엄마 아빠와 행복해야 할 어린 시절이 상상조차 어려운 불행으로 점철되어 온 한 소녀의 인생사가 그저 우리 모두의 잘못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못해 쓰렸다. 학생도 나도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나는 학생의 두 손을 잡았다.
“그동안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냈구나. 그런데도 넌 누가 보아도 똑똑하고 씩씩하고, 그리고 리더십도 있고…. 어쩜 그런 환경 속에서 이렇게 잘 커왔니? 네게 부모님은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넌 그 부모님으로부터 좋은 두뇌와 신체, 그리고 예쁜 외모도 물려받아 공부도 잘해서 이렇게 장학생으로 간호학과에 들어와 공부하고, 또 건강해서 밤에 아르바이트까지 해내며 과대표도 하고 있지 않니? 넌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인내하며 지금까지 잘 살아온 거야. 앞으로 힘들 때는 나를 찾아와 무슨 얘기든 좋으니 상의해. 힘든 시간이 되겠지만 아르바이트하며 공부도 게을리하지 말고 꼭 졸업해서 취직도 하고 좋은 간호사가 되어야 한다.”
그 후에도 이 학생은 크고 작은 일로 몇 번 학장실로 들렀었다. 그러다 한동안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2학년 1학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2학년 주임교수가 내 방으로 급히 왔다. 이 학생이 어젯밤에 음독자살을 시도해서 응급실로 실려갔고,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순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퇴원하여 등교한 날, 그 학생을 내 방으로 불렀다. 앉자마자 학생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학장님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왜 그랬어?”
“실은 제가 학장님 말씀을 듣고 얼마 전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었는데 믿었던 남자친구로부터 배신을 당했어요. 동시에 제가 가장 좋아하고 믿었던 3학년 선배 언니로부터도 배신을 당했어요. 저는 동시다발적으로 인간에 대한 배신을 당하고 나니 살 의미를 잃었고, 저도 모르게 그런 행동을 하고 말았어요. 죄송합니다.”
그때 처음으로 이 학생이 심하지 않은 우울증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남자에 대한 반감이 걱정되어 세상 모든 남자가 다 나쁜 것은 아니니, 좋은 남학생이라면 친구로 사귀고 남자에 대한 혐오감을 서서히 없애고자 노력해보라고 했던 말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러한 충고가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니었나 싶었다. 그 후 불미스러운 소문이 친구들에게 알려진 것이 부담되었는지 하루는 내 방에 찾아와 자퇴서를 제출했다고 했다. 내가 자퇴서 제출을 반대할 것 같아서 아예 제출해버리고 왔 다는 것이었다.
“한 번 더 잘 생각해봐라, 후회할 수도 있으니까. 2년여만 지나면 졸업하게 되고 좋은 병원에 취업해서 어엿한 간호사로 평생 살아갈 수 있는데 순간의 결정으로 평생을 후회할 수도 있으니 다시 심사숙고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대신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해보겠다고 했다. 평생 내가 간호학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끝내 간호학 교수가 되어 일평생을 살아온 나를 생각했다. 적성에 맞지 않아도 나처럼 참고 살면 그것이 네 인생이 될 수도 있다고, 나를 예로 들면서 충고해야 할지 아니면 내가 못한 일이니 너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떠나라고 하는 것이 선생으로서 옳은 길로 인도하는 것인지 판단이 어려웠다.
결국, 그의 선택을 존중해주고 싶었다.
“그래, 네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서 다음에 또 만나 이야기하자.”
그렇게 그날은 헤어졌다. 나는 많은 생각 끝에 학교를 그만둔 그를 다시 만났다.
“내가 일 년 학원 등록비와 용돈을 대줄 테니 네가 가고 싶은 학과를 선택해서 다시 재수를 해봐. 긴 인생에서 2~3년 늦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 다시 마음 다잡고 공부할 준비를 해 봐.”
그 친구가 생각해보겠다며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만난 자리에서 그 친구는 재수하기보다는 평소 요리에 흥미를 갖고 있으니 요리를 배워보겠다고 했다. 요리사로 성공해서 돈을 벌 것이며, 돈을 많이 벌어 나에게 백배 천 배로 갚겠다는 말까지 했다.
“공부는 너무 긴 시간을 쉬면 어려우니 다시 한 번 생각해서 나중에 후회가 없도록 해라.”
그 친구는 단호했다. 후회하지 않고 요리 분야에서 성공하고 싶다는 뜻을 분명하게 보였다. 그 후 그 친구는 퓨전 식당에서 재미있게 배우며, 적지만 월급도 받고 즐겁게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스승의 날, 직접 만든 것이라며 여러 가지 피클을 병에 담아 예쁜 카드와 함께 가져왔다.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학장님!
20살에 처음 뵌 게 어제 같은데
벌써 3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학교를 뛰쳐나가면서 성공에 대해서 장담하던 제 모습 기억하세요?
그 어린 모습보다 새삼 느껴지는 건 그런 저를 그대로 받아주시던 학장님의 큰 모습입니다.
아직 저는 학장님께 자랑스러운 제자가 아닙니다.
그렇게 많이 가르쳐주시고
그렇게 많이 도움 주셨는데
아직은 많이 부족한 저를 용서해주세요.
학장님의 제자로서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서 말씀드릴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못난 제자지만 앞으로의 삶도 계속 얘기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앞으로는 학장님이 보셔도 충분히 자랑스러울 만큼노력해왔고 또 열심히 사는 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