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 단골손님 비결은 기계식<프랜차이즈> 아닌 순수한 '손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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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단골손님 비결은 기계식<프랜차이즈> 아닌 순수한 '손맛'
  • 유정아기자
  • 승인 2017.03.09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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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읍 하얀 풍차 김광욱(65)대표
15살부터 시작된 빵과의 인연으로 반세기 흘러
학생들 위해 마진 없는 1000원짜리 햄버거 고수
옥천에서 빵집만 33년… ‘빵 터줏대감’으로 우뚝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지만 젊은이의 대표적인 데이트 장소로 빵집이 꼽히던 때가 있었다. 그 당시 빵집 청소를 시작했던 15살 김광욱씨는 예순이 넘은 지금, ‘하얀 풍차’ 빵집을 운영하며 제빵사가 되었다. 빵 하나에 울고 웃었던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본다./편집자주

 

하얀 풍차를 운영하는 김광욱(65) 대표.

요즘에서야 파티쉐, 제빵원 등 그럴싸한 이름을 갖고 빵 만드는 이들이 대우받지만 50년 전엔 공장장이라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빵 공장에서 빵을 만드는 사람이라며 생긴 이름이다.

이 시기 불과 15살이었던 김광욱(65)씨는 빵집 일을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도 김씨는 바닥청소와 재료 나르기 등은 물론 연탄으로 빵을 구운 화기까지 감수하며 일해야 했다. 순전히 육체노동만 2년 가까이 버텨낸 것이다.

김씨는 “너무 어리다보니 무시도 많이 당하고 빵 레시피는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그저 자주 보면서 어깨너머 빵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라고 회상했다.

김씨는 어렵게 배운 제빵 기술을 손에 익힌 뒤에도 사회에 일찍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제빵 기술을 제대로 평가받기 어려웠다. 매일 계속되는 고된 노동에 지칠 법도 하지만 조금씩 익혀가는 제빵 기술에 하루하루 버틸 수 있었다.

김광욱(65)씨가 운영하는 빵집 '하얀 풍차' 외관.

▲멀고도 험한 ‘빵 공장장’의 길

그 당시 빵을 만드는 ‘공장장’이 되려면 총 5단계를 거쳐야 했다.

빵집에 맨 처음 들어가면 ‘시다’부터 시작했다. 흔히 보조원을 속되게 이르는 이 단어를 가진 이들은 기본적인 청소와 잡무를 본다.

빵집 문턱이 익숙해질 무렵, ‘가마돌이’가 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빵을 굽는 일을 담당하는 것이다. 뜨거운 화기가 힘들게 하지만 이 단계만 넘어서면 ‘주단바’가 될 수 있다. 재료배합을 하는 ‘주단바’는 식재료를 만질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이후 기술자 바로 아래서 도와주는 조수격인 ‘주마리’는 어깨넘어 제빵 기술을 배우는 기회를 갖게 되고, 밀가루로 손이 하얗게 물들면 ‘공장장’이 되는 것이다.

김씨 또한 이 과정을 보내고 당시 대전에서 유명했던 태극당과 성심당 등 여러 곳에서 빵을 만들었다.

김씨는 “제빵 기술이 일본에서 넘어온 것이 대부분인 시절이라 제빵사의 직책도 일본식 단어를 대부분 사용했다. 프랑스 제빵 기술은 그 이후다. 제빵과 관련된 식기는 지금도 일본어가 많다”라고 말했다.

초코케이크.

▲서울로 떠난 유학생활

김씨가 대전에서 공장장이 된 뒤에도 제빵 기술에 대한 갈증이 계속됐다. 고민을 거듭했지만 이왕 시작한 제빵의 길에 제대로 들어서고 싶다는 욕심은 떨쳐내기 어려웠다.

결국 ‘서울에서 제빵 기술을 배우겠다’는 일념만으로 상경하게 됐다.

다행히 서울에 있는 빵집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닿았지만 제빵 기술은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김씨는 “예전에 대전에서 서울로 가는 건 지금의 ‘유학’에 비유할 정도였다. 대전에서 나름 빵을 만들었다고 자부했지만 그전에 배운 기술과는 월등히 차이가 났다. 다시 밑으로 들어가서 배웠다”라고 말했다.

물론 배움의 의지만으로 버텨내기엔 어려운 순간도 있었다.

김씨는 “15살 때 했던 철판닦이를 서울에서 다시 할 땐 ‘괜한 고생을 하는 건 아닌가’ 고민도 했다. 하지만 그때의 고생이 허투루 돌아가진 않았던 것 같다. 남들보다 빠르게 배워 내 일을 마치면 다른 사람 일을 도왔다. 자연스럽게 제빵 기술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빨리 왔다. 제빵실력을 인정받는 단계에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7년간 서울에서 기술을 배운 뒤 대전으로 돌아왔다.

꽃잎 모양 생크림 케이크.

▲첫 빵집은 실패

서울에서 대전으로 돌아온 김씨는 생애 첫 빵집운영을 시작했지만 처음의 시련은 김씨라고 예외 없었다.

제대로 된 빵을 만들어보기도 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것이다. 빵집 건물을 짓고 있는 중에 모든 식자재 가격이 폭등했다.

김씨는 “난리 통에 설탕 값과 다른 부자재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공사가 끝난 뒤에도 식자재 가격은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빵을 만들수록 적자가 쌓였다. 결국 빵집 개업 4개월 만에 그만 뒀지만 그때 생긴 손해로 3년간 빚을 갚았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제대로 된 운영도 못해보고 예상치 못한 상황전개에 허무했던 감정을 밝혔다.

수제 초코파이.

▲‘하얀 풍차’로 다시 시작

처음의 실패를 뒤로하고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왔다. 지인의 권유로 당시 옥천군에 있던 중앙백화점 코너 안에 ‘하얀 풍차’ 빵집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빵집은 운영하자마자 손님들로 북적였다. 요즘은 빵을 포장해서 가져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과거엔 빵을 먹고 가는 손님들이 많았다.

김씨는 “야채빵이 하루에 70~80개가 나갈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먹고 가는 손님이 많아서 백화점 휴게실엔 빵을 먹으며 데이트하는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청춘의 데이트 코스였고, 추억의 장소였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몇 년 뒤 백화점에서 나와 개인 빵집을 열었지만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면서 지금까지 운영해오고 있다. ‘하얀 풍차’라는 이름으로 빵을 판 것이 30년을 넘어섰다.

김씨는 “예전에 인기 있던 빵집이 ‘하얀 풍차’였다. 그때 쓰던 이름을 계속해서 쓰게 된 것”이라며 “두 번째 개인 빵집을 시작한 날짜를 아직까지 기억한다. 1984년 8월 24일 개업한 이 빵집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 됐다”라고 말했다,

발효중인 단팥빵 사진.

▲끊임없는 빵 연구

단순히 먹거리 수도 증가했지만 대기업들의 지역상권 점유율까지 높은 상황 속에서 ‘하얀 풍차’가 살아남기 위해선 차별성이 필요했다.

김씨는 시즌마다 새로 생기는 프랜차이즈 빵에 뒤지지 않도록 새로운 빵 연구를 틈틈이 한다고 밝혔다. 일본에서 진행하는 세미나까지 참석하며 새로운 빵 기술을 배운다.

일반적으로 케이크는 기술이 가장 많이 들어가기때문에 제빵사의 감각이 드러난다. 김씨의 케이크는 유독 다양하고 화려한 꽃잎 모양 케이크가 많다. 꽃잎은 생크림이 든 짤 주머니로 만든 정교한 기술의 결정체가 된다.

김씨는 “모든 일이 그렇지만 빵을 만드는 과정에도 소홀히 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 전 과정을 오롯이 빵에 신경 써야 한다. 하나의 빵을 만들기 위해 7~8가지의 재료가 들어가고 반죽, 발효 시간, 굽는 정도, 모양까지 신경을 써야한다. 옛날엔 모든 것을 손으로 했지만 지금은 기계의 도움을 받는 부분도 있다”라고 말했다.

김씨의 경력은 이미 실력을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2007년 제빵 자격증까지 취득하면서 전문성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힘든 시기는 오기 마련이다.

특히 지난해 AI파동으로 인한 계란값 가격 폭등으로 전국 빵집이 휘청였을땐 프랜차이즈 빵집보다 개인 사업장이 달걀공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김씨는 “계란파동 때문에 슈퍼에서 직접 사오기도 했다. 그마저도 판매량 제한이 있어 지인들까지 직접 총 동원한 기억이 난다. 옥천군은 그나마 피해가 덜했지만 대형 기업들에 비해 개인 상점이 체계적인 물량 확보에 어려운 점은 어쩔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하얀 풍차'에서 판매하는 빵.

▲정성을 담은 빵

새로운 빵을 선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존에 판매하는 빵에도 정성을 담았다. 이윤 추구에 집중하는 프랜차이즈 상점보다 개인 사업장이 줄 수 있는 따뜻함으로 공략한 것이다.

착한가격 모범업소에 선정된 ‘하얀 풍차’는 지금도 햄버거 빵을 1000원에 판다. 학생들을 위해 마진 없이 판매하는 것이다. 본인의 학창시절을 추억하며 학생들에게 봉사하는 기분으로 판매한다고 밝혔다.

그밖에 ‘하얀 풍차’에서 인기리에 판매하고 있는 밤 페스츄리, 아몬드 센베이, 수제 초코파이 등은 기존에 있는 빵이지만 다른 곳보다 아낌없이 재료를 사용해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 해바라기씨, 참깨 등을 더 첨가하면서 고소한 맛을 배로 만들었다.

김씨는 “기존에 있는 빵에서 새로운 재료와 모양, 기술을 더해가면서 소비자 입맛을 잡을 수 있는 빵을 고심한다. 하지만 언제나 기본에 충실해야한다. 아낌없이 재료를 쓰면서 손님들에게 만드는 이의 정성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끝으로 김씨는 “지금이라도 기술자에게 자리를 맡기면 몸이야 편하겠지만 정성이 부족해질까 걱정돼 직접 하고 있다. 일반 손님들은 못 느끼는 차이겠지만 내 눈에는 보이는 것을 모른 척 그냥 맡길 순 없다. 가능한 한 오래도록 빵집을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하얀 풍집'에서 판매하는 빵. (두 번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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