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은 1950년 5월 『국도신문』에 「남해오월점철」을 남긴다. 청계 정종여와 함께 남해 기행을 떠난 것이다.
필자는 『정지용 만나러 가는 길』을 준비하며 부산, 통영, 여수, 진주, 제주도, 오룡배, 교토 등을 다녀왔다. 그런데 아직도 정지용의 발자취를 다 더듬어보지 못한 것만 같다. 그래서 지난 7월에 일본 교토, 8월 초에 제주도를 다시 다녀왔다.
제주도의 한라산에 오르고 싶었지만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일행에게 미안하여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였다. 가는 발자국마다 정지용의 흔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정지용에 대한 고질병이 완쾌되기에는 먼 것만 같다.
다시 부산으로 기행을 떠나며 「정지용 논단」의 원고를 남기고자 한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이면 지면에 이 졸고가 실려 있을 것이다.
1950년 당시 정지용은 부산에 도착한다. 그 일행은 이중다다미 육조방의 삼면을 열어놓고 사랑가, 이별가는 경상도 색시 목청을 걸러 나와야 제격이라며 술을 마신다. 싱싱한 전복, 병어, 도미, 민어회에 맑은 담지국에 “내일부터 안 먹는다. 오늘은 마시자!”라며 호기롭게 술을 마신다.
이들은 어찌 드러누웠는지 기억에 없고 술이 깨자 가야금 소리처럼 빗소리가 토드락 동당거린다. 이 소리를 들은 정지용은 “청계야! 청계야! 비 온다! 비 온다!”며 반갑게 비를 맞이한다.
청계는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오사카미술대학에서 공부한 동양화가 정종여(1914~1984년)를 가리킨다. 그는 해방 이후 성신여자중학교, 배재중학교, 부산 대광중학교에서 재직하였으며 1950년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8년 해금되어 정지용과 같이 우리에게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인연은 참 기묘하다. 이렇게 여행을 다니며 즐거웠던 이들은 같은 해에 청계는 월북, 정지용은 행방이 묘연해졌다. 소설 속 주인공들 같지만 역사의 소용돌이로 운명이 결정된 이들을 생각하니 창밖의 빗소리마저 부질없이 슬픈 가락으로 울려온다.
정종여는 월북할 때 남한에 두고 간 자녀들을 그리며 ‘참새’라는 작품을 창작하였다. 참으로 비극적인 역사를 살다가며 자식을 그리워하였을 정종여를 생각하니 가슴 한 켠이 아려온다.
정종여와 정지용은 한국화단과 한국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 정종여는 붓으로 마음을 그리는 화가였고 정지용은 청신한 감각과 독창적 표현으로 시어를 개척한 시인이었다.
이 둘은 ‘일제’라는 혼돈과 핍박 그리고 궁핍의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다갔다.
그러나 그들이 남겨놓은 예술작품은 지금까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들의 작품은 우리에게 살아가는 의미로 감동을 주고 있다.
원고 정리를 하는 이 밤.
창밖으로 비오는 소리가 차분하게 들려온다.
금방이라도 단비를 반기는 정지용의 소리가 빗속을 뚫고 들려올 것만 같다.
부산에 가면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한 『낙타』도 찾아야 하고 “「나비의 풍속」 대사 연습을 표준어로 한”다고 신기해하던 정지용의 모습도 그려볼 일이다.
그리고 “정지용의 여자 친구는 단 한 명”이었다고 전하는 정지용 연구가도 만나야할 일이다.
비는 아직도 차분히 통당 거리며 지구를 연이어 방문하고 있다.
『낙타』의 운명은 어디에서 쇠하였는지 혹은 영영 만날 수 없는지. 정지용의 마지막 행적과 함께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부분이다.
이번 여행에서 빈손으로 터덕거리고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먼저 안부를 전하는 밤이다. 비는 여전히 굳세게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