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의 호국정신 기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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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의 호국정신 기리자
  • 김영훈기자
  • 승인 2019.06.13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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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조헌 발자취 따라 호국보훈의 시간
후율당~조헌 선생 묘소와 표충사~이지당

임진왜란 때 붓 대신 칼을 들고 의병을 일으킨 선비 ‘중봉 조헌’. 옥천은 그가 구국일념의 의지를 세운 곳이며 전사 한 후에 뼈가 묻힌 땅이다.

안내면 도이리 ‘옥천 후율당’, 안남면 도농리 ‘중봉 조헌묘소와 표충사, 신도비’, 군북면 이백리 ‘옥천 이지당’ 등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후율당은 조헌의 발자취를 볼 수 있는 첫 번째 유적이다. 선조17년(1584) 그는 보은 현감에서 파직 당한 후 옥천 안읍(安邑) 밤티(栗峙)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후율정사(後栗精舍, 현 후휼당)를 짓고 학덕 있는 선비들과 지내면서 문하생을 두었으며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데 힘썼다.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던 율곡 이이의 제자였던 조헌 선생은 스스로 자신의 호를 후율(後栗)이라 하고 당(堂)의 이름도 후율이라 했다.
현재 후율당은 안내면 도이리에 위치한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퇴락되어 가던 중 철종5년(1854) 후손들이 옥천군 백운동으로 이건했다. 그 후 고종 원년(1864) 현 위치로 옮겼으며 1977년 중건하여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으로 삼고 있으며 경내에는 아들 완기의 효자각이 있다. 1592년 4월 왜군이 침입하자 다음 달 청주에서 처음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했던 조헌 선생은 보은, 공주 등에서 승병과 함께 항전했다.

그해 8월 16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청주성을 탈환하고 잔여 의병을 이끌고 충남 금산 전투에 나선 조헌 선생은 7백 의사와 함께 순절했다. 제자들이 7백 의사들의 유해를 한곳에 합장하고 선생의 유해는 별도로 옥천군 도리동에 안장했으나 인조14년(1636) 현재 위치로 이장했다.
그곳은 후율당에서 10㎞정도 떨어진 안남면 도농리로 그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는 표충사와 그 넘어 언덕 위로 난 돌계단을 오르면 묘소가 보인다. 300여 그루의 소나무가 묘소를 둘러쌓고 있어 그 느낌이 온화하고 발 아래로 표충사와 잔디광장을 바라보면 조헌 선생의 기백에 취할 수 있는 곳이다.

현재 묘역에는 묘비 2기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이곳으로 이장할 당시 우암 송시열 선생이 그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다. 묘역을 나와 우측 길로 나서면 전통 건축양식의 비각이 설치된 것을 볼 수 있다. 그 안에는 조헌 선생의 신도비가 있다. 인조27년(1649)에 세운 비로 그곳에는 선생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최후의 격전지였던 금산싸움에 대해 자세히 적혀 있다. 조헌 선생의 흔적은 군북면 이백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이지당(二止堂)이다. 이곳은 조헌 선생이 지방의 영재를 모아 강론하던 각신서당이었다.

현재의 이지당은 송시열 선생이 주도하여 세운 건물이지만 원래 이 장소는 당시 안읍에 살던 조헌 선생이 왕래하며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이라고 한다.

군 관계자는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조선의 선비이자 의병장인 조헌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옥천을 여행하면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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