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군 군북면 서남부에 위치하며 식장산 동쪽 기슭마을로 ‘부추’ 생산이 유명한 ‘자모리’.
특히, 자모리 ‘부추’는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지금도 마을 주민 상당 수가 ‘부추’ 생산에 종사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비길 바가 못된다.
주민들의 연령도 그렇고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가격은 농민들로 하여금 부추배재를 멈추게 한다.
그레서 언제부턴가 주민들은 ‘아욱’과 양념용 갓을 더 많이 재배하고 있다.
아무래도 부추보다는 아욱이나 갓이 더 경제성이 높기 때문이다.
지금 자모리는 3.64㎢의 면적에 142가구 283명이 살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그 자체이다.
자모리는 지형적으로 동으로는 이백리와 인접하고 남으로는 군서면 오동리, 서로는 대전시 동구 세천동 그리고 북으로는 증약리와 접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바로 옆이 대전광역시다.
1739년에 발행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군북면 증약리에 속해 있다가 1830년 증약리가 분리되어 모곡동리(자모리)와 비하동리(비야리)가 신설되어 처음으로 모곡동리라는 마을명이 생겼다.
옥천 관문에서 15리라 기록하고 있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지금의 자모리라는 지명이 생겼다.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부추’ 재배 지역
“저희 자모리는 대대로 ‘부추’ 농가가 많습니다.
자모리 ‘부추’는 전국적으로 그 유명세를 알아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자모리 ‘부추’가 영양면에서나 품질면에서 뛰어나다는 증거겠죠”라는 자모리 김영우(65) 이장.
김 이장이 자모리 이장을 맡은건 햇수로 6년째.
고향이 이곳 자모리이면서도 김 이장은 지난 세월 인근 대전에서 젊음을 보냈다.
그러던 2012년 어느 날, 여우도 죽을 때에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둔다는 수구초심(首丘初心) 때문이었는지 자꾸만 고향 자모리가 그리워졌다.
잘 나가던 사업도 접었다.
그래서 고향 자모리로 유턴을 했다.
일단 마음이 편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고향이 따뜻했다.
무엇보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마을 사람들을 매일 만날 수 있다는게 더 좋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변고(?)가 생겼다. 마을 주민들이 김 이장을 자모리 이장으로 추대를 한 것.
아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이장을 맡으라고 일방적으로 밀어 버렸다.
경로당 남·녀 방 따로 만들어
울며겨자 먹기로 이장을 떠맡은 김 이장은 기왕 맡은 이장 주민들의 뜻에 부합하자는 마음으로 두 팔을 걷어 부쳤다.
그리고 마을 내 산적해 있는 문제들을 하나 둘 처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그간 하나의 방에 남녀 노인들이 쉬는 경로당의 방을 남자와 여자가 따로 쉴 수 있도록 경로당을 넓힌 것.
어르신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가뜩이나 좁아 다들 경로당 나가는걸 꺼려해 오던 차 김 이장이 이처럼 방을 따로 만들어 주니 얼마나 마음이 편하고 자유스러운지 두말할 필요가 없어졌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행정 필요
김 이장은 내친김에 또 다른 일감을 찾아 나섰다.
자모리 마을 입구가 지나치게 비좁아 허구헌날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김 이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옥천군 관계자를 만나 설득을 했다.
선거때만 잠깐 확장을 해주겠다는 이야기를 나누다 시들해 버리는 도로확장을 더 이상 미루지만 말고 분명하게 처리를 해 달라고 부탁을 넘어 읍소를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감감무소식이다.
“마을 입구 넓히는게 마을 주민 모두를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군에서는 방관만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더 많은 사고가 나야 길을 넓혀 주려는지 모르겠습니다”라는 김 이장은 “말로만 주민을 위한다고 할게 아니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그런 행정을 펴 주었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귀촌이나 귀농도 문젭니다. 저 역시 오랜 도시생활 끝에 귀촌을 한 사람인데 정작 귀촌·귀농인에 대한 정책은 전무합니다. 저 같이 고향이 이곳인 사람도 많은 실망을 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모른 채 귀농이나 귀촌을 한 사람들은 너무도 황당하고 배신 당한 느낌을 받을겁니다”라는 김 이장은 “하루 빨리 코로나가 종식돼 예전처럼 마을 어르신들이 경로당에 모여 도란도란 얘기 나누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주민들이 행복할 때 저 역시 행복함을 느낍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