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독립운동가 조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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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독립운동가 조동호
  • 오현구기자
  • 승인 2021.05.20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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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으로 독립운동을 한 조동호 선생
펜으로 독립운동을 한 조동호 선생

 

조동호는 1892년 8월 4일 충북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에서 3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905년 청산에 신명사립학교(현 청산초등학교)가 개교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3년을 다니다가 큰형 조동석의 권유로 한성부로 상경했다.

1908년 한성 경성측량학교에 입학, 1910년에 수료한 뒤 측량기사가 됐다. 1907년 무렵 국립측량학교에 다닐 때 같은 건물에 있던 국립우편학교 출신인 여운형을 우연히 만나 이때부터 그는 여운형과 일생의 동지가 된다. 이후 여운형의 소개로 이만규를 알게 됐고 이들은 서로 친해지면서 교우를 쌓게 된다.

1912년 당시 조동호는 측량기사였는데 신촌으로 가던 중 일본인과 한국인이 싸움을 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때 일본 순사는 일본인 편만 들고 한국인에게는 야단을 쳤다. 이에 조동호는 부당성을 지적하며 일본 순사 5명과 실랑이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서대문경찰서에 끌려가 구타를 당하고 약 1개월 간 잡혀 있다가 풀려났다. 이를 계기로 조동호는 항일의식과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조동호는 1923년 12월경 귀국해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이후 동아일보 논설위원과 동아일보 특파원 등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일장기 말소사건을 주도했다. 그리고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기사와 조선총독부를 비난하는 기사를 썼다. 그러나 일제의 검열 등 탄압에 압박을 느껴 1924년 10월 중국의 펑즈전쟁을 취재하기 위한 특파원으로 떠난다. 관련 기사를 동아일보 1면에 20회 가량 기고했으나 그의 최대 관심 과제는 독립운동이었다. 그가 쓴 기사는 우리 민족에게 독립에의 희망을 불어넣었다. 일제에게 조동호는 눈엣가시였다.

1928년 2월 사회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상해 일본 영사관 경찰에 의해 체포돼 본국으로 강제송환됐다. 이후 경성 종로 경찰서로 압송돼 서울 경성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과 증거인멸죄로 4년 형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31년 12월 만기 출옥 후 조동호는 신병을 치료하면서도 언론 활동을 계속했다. 이듬해 그의 형 조동석과 사촌동생 조동순, 조동순의 매제인 충남 논산의 갑부 윤희중의 출자로 중앙일보를 인수했다. 그 후 조선중앙일보로 이름을 바꾸고 확장했으며 여운형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조동호는 편집 고문과 논설위원과 주필로 활동했다.

그는 일제를 규탄하는 논설을 계속 게재해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불어넣는다. 그 와중에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이 터졌다. 원래 일장기가 말소된 손기정 선수의 사진은 조선중앙일보에서 제작한 것이었고 이를 동아일보가 다시 게재한 것이었다. 끝까지 일제에 저항하던 조선중앙일보는 1937년 11월 폐간을 당한다.

13년 후인 1950년 김일성이 남침을 해 6·25가 발발하자 조동호는 “김일성은 나이가 어려 철이 안 난 아이다. 백성을 다 죽이고 어쩌자는 건가. 남북이 이제 원수가 됐으니 우리가 합치려면 앞으로 100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라고 한탄했다.

그 후로 경기도 수원 교동에 살던 누님의 집과 고향인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를 오가며 일제강점기 투옥 생활 중 고문으로 얻은 지병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한국 전쟁을 겪고 1954년 9월 11일 고향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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