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의 대 유학자 유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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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의 대 유학자 유식 선생
  • 강형일기자
  • 승인 2021.07.08 10: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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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양서당 전경
덕양서당 전경

조선조 인조 때 인평대군의 사부였던 유식 선생은 뛰어난 학문과 문장으로 중봉 조헌 선생의 추증상소문을 지어 올렸으며 굳은 지절로 폐모론(인목대비 폐비론) 반대 주장을 펼친 의로운 선비로서 우암 송시열, 동촌 송준길, 초려 이유태 등 당대의 거유 등과 사계 김장생 선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우리 고장의 대 유학자이다.

휘는 식(軾), 자는 자경(子敬), 호를 덕곡(德谷)이라 했으며 본관은 무송(茂松)이고 옥천군 안읍현(안남면 덕곡리 덕실)에서 생장(生長)했고 두 살 때 이미 문자를 해득했다고 한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정성지례(定省之禮 지극정성으로 부모님을 살피고 봉양), 고면지규(故面之規 부모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자상한 보고를 드림)를 다했다고 한다.

광해군 시절 과거시험에 응시하고자 서울에 가서 삼각산의 절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몇 흉도(과격분자)가 찾아와 이른바 폐모론에 가담해 줄 것을 종용하고 협박했으나 일절 응하지 않고 굳은 지절을 지키시다가 고향인 덕실로 귀향했다.

유식 선생은 중봉 조헌 의병장의 업적을 선양하고 그 행적과 충렬을 세상에 밝혀 후세에 전하고자 그 유명한 추증상소문(追增上疏文 임금께 어떤 훌륭한 분의 업적을 보고하여 그분의 벼슬과 명예를 수여하자는 글)을 썼다. 그 당시 호서 일대에서 모인 석학들이 써낸 상소문 가운데에서 유 사부공의 상소문이 유독 훌륭하여 사계 김장생이 극찬을 하며 채택, 상소를 올린바 칙명이 내려 중봉의 업적을 선양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뿐더러 오늘날 중봉충렬제를 거행하기까지 이르렀다.

1633년에 공은 우암 송시열 선생과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40년에 인평대군의 사부로 제수되어 학식과 덕망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 후, 군기시 주부(종6품), 장례원 사평(정6품)을 역임했으며 지방관으로 나가 행(行) 목천 현감으로 재직 시에는 청백리(淸白吏) 목민관으로 몸가짐을 얼음같이 맑고 차게 하여 만인의 모범이 되었다. 얼마 안 되어 사건에 계류된 후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해 덕양서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이다가 1650년 65세를 일기로 정월 7일 타계했다.

유식 선생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대기근, 정유재란, 영창대군의 죽음, 인목대비 서궁 유폐 그리고 인조반정, 이괄의 난에 이어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국치, 인질이 된 세자 일행 등 나라의 존망을 뒤흔들만한 역사적 사건들이 실로 숨 가쁘게 연이어 소용돌이치고 있었던 시대이다. 이렇듯 어려운 시국에 지조를 지키면서 살아낸 선비 중 선비였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덕으로 감화시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바른길을 모색하고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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