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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미련 작가
  • 승인 2023.08.31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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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지하 깊은 곳에 갇혀 있다. 지상의 것들은 찾아볼수 없는 어두운 곳에서 그림자처럼 산다. 햇살은 잊은 지 오래다. 아무리 태양을 떠올려도 눅눅하던 몸은 좀체 마르지 않는다. 절망하고 사는데 어디선가 빛이 칼날같이 스며든다. 눈이 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실눈을 뜨고 다시 응시한다. 지상을 잇는 바늘 같은 틈새로 햇살이 소나기처럼 내린다.

자주 상상하는 이미지다. 길이 막혀 앞이 막막할 때 틈새로 쏟아지는 한 줄기 빛은 어제의 보상이고 오늘을 버티게 하는힘이다. 틈이 주는 위안은 통창으로 푸지게 쏟아지는 태양의 열기와는 비교되지 않는다. 얕은 틈을 비집고 들어온 한 줄기 햇살이 통창의 열기를 거뜬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다. 없는 가운데 얻은 하나는 흔한 열 개보다 귀하고 강하다. 많고 적음은 상대의 수용 여부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기에, 숫자의 절대성이 무참히 깨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틈이 주는 위안이 이리도 큰데 여전히 틈에 인색했다.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가리고 메우기에 바빴다. 틈에 기생하는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편은 첫 만남부터 틈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었다.빈틈이 흠으로 비춰도 상관없다는 듯 자유로웠다. 어눌한 말투, 한쪽으로 기울어진 슈트와 성근 신발 끈이 그의 성격을말해주었다. 안전을 위해 절댓값을 찾아 헤매는 연구자로 보이지 않았다. 틈새를 비집고 다가가 손목을 덮은 소매를 걷어올려 주고 싶었다. 그의 헐거움이 낯선 이에게 겨누던 나의날을 무디게 했다. 틈은 흠이 아니라 단단한 자신감으로 보였고 외부인에게 가로놓인 마음의 벽을 허물어주었다.

일 년간의 연애 끝에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한 가지 답만있는 게 아님을 처음부터 안 사람처럼 남편은 유연했다. 걸핏하면 열쇠를 잊고 들어와도 당황하지 않았다. 되짚어가면서찾아내는 과정을 즐거워했다. 현무암 담벼락처럼 허술한 그의하루가 자연스럽게 굽이치는 삶의 지문 같아 편안했다. 그를보고 있으면 서투른 나의 하루도 안심이 되었다.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참지 못하고 핏대를 세우는 성급함은 의외였다. 자기 생각에 집중하느라 서툴고 거칠어져 많은 오해를 불러오기도 했다. 모난 세상에 이리저리 부딪기도 잘하지만 계산할 줄 모르는 순수함도 틈이 많아서 지키는 듯했다. 간혹 그가 가진 틈 때문에 곤경에 빠지곤 하는데, 그럴때마다 곁에서 손발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의 틈이 그와 나 사이의 틈을 메워주었다.

오래전, 뉴질랜드행도 틈이 많은 그이라서 결단할 수 있었다. 현실이 버거워 숨이 차 헐떡일 때 남편은 외국행을 제안했다. 아이 교육을 핑계로 현실을 벗어나길 바랐다.

일상의 수레바퀴가 점점 덩치를 불려 달려오는 듯했다. 방향 없이 거대한 물살에 떠밀리는 기분이었다. 구르는 바퀴를멈춰 세우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앞지르는 그들과 점점 벌어질 간극을 초연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했다. 지금까지들인 그만큼의 시간과 이탈한 후에 다가올 후폭풍을 각오해야했다. 아이들의 미래가 걸린 문제라 소심해질 수밖에 없었다.그냥 지나쳐 가기도, 그렇다고 멈춰서기도 난처한 순간에 남편의 결단은 실마리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적절한 때에 틈을 선물한 그가 고맙다. 그곳에서는 줄곧 아이들과 함께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나머지는 오롯한 내 시간이었다. 낯선 곳에 서니 자신이 더 잘 보였다. 저무는 하루가 아까워 햇살을 받으며 종일 테라스에서 뭉그적거렸다. 나목에 붙어 있는 삭정이가 힘줄 좋은 여름 포도 넝쿨이 되는 것을 보면서 내 안에 숨어 있는 생명력을 포도나무처럼 끌어내고 싶었다. 포도나무는 그후로도 쑥쑥 자랐다. 죽은 듯 살다가도 틈에 본 포도 넝쿨을 떠올리면 신기하게 힘이 솟았다. 멈춘 듯하나 멈추지 않았고 어느 때보다 지혜롭게 바삐 가고 있었던 지점이다.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며 잠시 쉬어가기도 하니 틈을 제대로 누린 게 맞다. 그냥 두면 전진밖에 모르는 삶의 수레바퀴를 잠시 멈춰 세운 시간.자주 뒤돌아보아도 불안하지 않은 유예의 구간이다. 틈은 빈것이 아니라 자연 상태처럼 애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난겨울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남편과 함께 달리기에 도전했다. ‘런데이’라는 프로그램에 따라 걷고 달리는 훈련이다.

8주 만에 30분 내내 쉬지 않고 달리는 힘을 기르는 것이 목표다. 오래간만에 뛰려니 1분간 이어달리기도 힘에 부쳤다.처음엔 1분 뛰고 2분을 쉰다. 점점 뛰는 시간이 늘고 걷는 시간이 줄어든다. 마법처럼 틈을 통하여 목표에 도달하게 하는프로그램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틈의 소중함이 깊숙이 다가왔다. 뛰는 동안 걸을 순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거다. 

틈에 맛보는 짜릿한 성취감과 온전한 평화. 틈은 달리게 하는 힘이요 희망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걷는 틈에 보니 달려온 좀 전이 뿌듯하고 걷고 있는 이순간이 달려갈 다음번에 힘을 주는 것이 아닌가. 틈이 있어이어 달릴 수 있었다. 틈은 완전한 것에 기생하는 어떤 것이아니라 필수불가결한 독립된 가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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