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난 때마다 공 세운 충간공 전식(全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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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난 때마다 공 세운 충간공 전식(全湜) 선생
  • 전순표 옥천향토전시관장
  • 승인 2023.09.07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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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문신으로 임진왜란과 이괄이 난 그리고 병자호란 때 큰 공을 세운 분으로 옥천 동이면 금암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정원(淨遠)이며 호는 사서(沙西), 시호는 충간공(忠簡)으로 본관은 옥천 전씨(沃川全氏)로 1563년(명종 18년)에 태어나서 1642년(인조 20년) 79세에 생을 마쳤다.

전팽조(全彭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혼(全焜)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전여림(全汝霖)이며 어머니는 월성이씨(月城李氏)다. 유성룡과 장현광의 문인으로 관직은 대사간,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지냈다.

1589년(선조 22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해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김응남(金應南)의 추천으로 연원도찰방이 되었다. 1599년 예빈시직장으로 전임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603년(선조 36년) 식년 문과에 급제해서 1607년 성균관전적, 예조좌랑과 예조정랑을 거쳐, 1611년 울산판관이 되어 고을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광해군 때 벼슬 단념

다음 해인 1612년 전라도도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정경세(鄭經世), 이준(李埈) 등과 산수를 유람해 세칭 상사(상주)의 삼로라 일컬어졌다.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으로 새 왕이 등위하자 예조정랑에 이어 수찬과 홍문관 교리가 되어 경연에 참석하였고 장령 이르러 언관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태복시정이 되어 왕을 호종하였고 천안에 이르러 집의가 되었으며 군사 행동이 완만하여 난적에게 기회를 얻게 한 죄를 논술하고 연평군 이귀(李貴)와 원수 장만(張晩)의 실책을 논하였다. 이어 병조참의와 병조참지에 승진했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갔다.

상주의병 3천 명 이끌고 북상 

그 뒤 대사간·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모두 사퇴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 왕은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 이때 칠순 노인으로 상주에서 의병 3천 명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북상하여 청나라 군사에 대항했다. 전쟁이 끝난 후 왕에게 문안 인사를 드렸다. 이에 인조가 한양 도성으로 돌아오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 뒤 예조참의와 예조참판에 임명되었고 가선대부에 승계했으나 사양하였다.

1638년 대사간과 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 대사성이 되었다. 왕이 순검사에 명해 하삼도의 수군을 정비하게 했으나 적절한 시책이 아니라고 반대했다. 1642년 자헌대부의 품계에 오르고 ‘지중추부사 겸 동지경연춘추관사’에 임명되었다. 이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1639년(인조 17년)에 명나라 사절로 중국에 가게 되었는데 당시 세력이 강해진 청나라가 요동 지역을 차지하고 있어서 갈 수가 없게 되자 황해 바다를 배를 타고 건너서 명나라에 다달아 맡은 바 책임을 다하니 명나라에서는 후덕한 재상임을 칭찬하고 태사관(太史官)이 역사에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 뒤 재차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상주 백옥동서원에 제향되었다. 사후 증좌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다. 상주 옥동서원에서 제향을 올리며 옥천 목담영당에서 매년 봄에 제향을 올린다.

아들 전극항 남한산성 전사

한편 아들 전극항(全克恒)은 전식의 아들로 1612년(광해군 4년)에 진사 시험에 급제하여 예문관 대교를 지냈고 병자호란 때 예조정랑으로 어가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목숨을 바쳐 싸우다가 장렬하게 순절했다. 후에 인조는 전극항을 도승지로 추증하였고 1786년(정조 10년)에 충신문이 정려되고 상주 충렬사에서 제향을 올린다. 전식 선생의 초상화는 충북 유형문화재 제171호이며 상주의 사서공 전식 신도비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19호이다.

셋째 아들 청나라 끌려가 애태워

병자호란 때 셋째 아들 전극연(全克衍)이 행방불명되어 아버지 전식(全湜) 선생은 아들의 생사를 알지 못해 많은 애를 태웠다. 청나라에 끌려갔던 조선인 속환 된다는 소식을 기다리다가 죽은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도 1637년 왕세자와 함께 만주 심양에 사은사로 가는 이성구 좌의정에게 아들을 찾아봐 줄 것을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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