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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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난 인연
  • 박미련 작가
  • 승인 2023.09.14 14: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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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임이 올 조짐이다. 하루를 살뜰히 꾸려온 의식을 시작도 출구도 없는 혼곤한 지점으로 데려간다. 일상의 파닥임이 한데 섞여 기억 너머로 툭 떨어진다. 파랑 일던 잔물결이 수평선에 몸을 맡기는 지점. 끝도 없는 그곳은 텅 비었으되 몸을 감싸는 무언가가 다시 꽉 차오른다. 그에게 푹 빠졌다.

숱한 세월을 뒤로하고 이제 와 새삼 짝사랑이라니. 젊어서는 괄시하고 밀어내기 바빴는데 뒤늦게 비위 맞추느라 기진맥진이다. 밤 11시 30분 즈음이 그가 오는 시간이다. 세상일에 쫓겨 마중이 늦은 날에는 쌀쌀하기 그지없다. 그날은 그를 볼생각일랑 접어야 한다. 자신에게 엄격한 일관성은 상대에게도차갑고 깊다. 정한 시간을 어겼을 땐 눈길 한번 주지 않아 온 밤을 뜬눈으로 지새워야 한다. 그를 만나야 내일을 기약하는데 도리가 없다. 에너지는 바닥나고 몸은 소리 없이 얻어맞아 만신창이가 된다.

그럴 때면 달콤하게 속삭이던 그 시절을 습관처럼 떠올린다. 참으로 열렬했다. 그는 무시로 찾아와 까무룩 현실을 막아섰다. 평생을 해야 할 일인데 잠시 쉬어간들 어떠냐고 에너지 충전을 핑계 삼아 은밀히 꼬드겼다. 하긴 몸이 먼저 밖을향해 내달리던 시절이었다. 친구의 작고 소박한 행동에도 크게 반응하느라 충전하기 바쁘게 소진하던 에너지였다. 책상 앞에 꼼짝없이 잡혀 있을 때는 더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논리를 앞세운 그의 유혹은 나를 쉽게 굴복시켰다.
그는 밤 열한 시를 넘기기 전에 스르륵 의식의 문을 닫아걸었다. 풀어야 할 수학 문제가 널렸고 외워야 할 과목이 산더미인데 몸의 주인은 이미 내가 아니다. 지금은 그의 시간이라며 당당하게 주인 행세다. 눈앞에는 정열의 장미 향이 파고를 친다. 

무의식의 세계까지 지배당한 난 꼼짝없는 그의 포로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잠의 나락이다.

동녘으로 해가 고개를 내밀 때까지 뜨겁게 밀회를 나눴다.배설의 쾌감도 잊고 갈증도 참을 만큼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래도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무시로 무의식을 자극했다. 의식의 저편에서 그를 상대로 힘겹게 싸웠다. 안간힘으로 박차고 일어나 보면 여전히 책과 씨름 중인 룸메이트. 그를 버려두고도 아무렇지 않은 채 제 일에 몰두하는 친구가 낯설었다. 밤마다 혼절하는 나와는 달리 대나무처럼 꼿꼿한 친구가 부럽기만 했다.

그때의 잠은 불청객일 뿐이었다. 마음만 앞서서 시도 때도없이 들이대는 서투른 연인이었다.

짧고 굵게 왔다가 미련 없이 퇴장하길 바랐건만 허리 감고 놀아 달라고 

보채기만 했다.아이를 키울 때도 그랬다. 시간은 잡는 족족 돈인데, 시간을붙들 수 있다면 도둑질이라도 할 판인데 잠은 금쪽같은 내 시간을 대놓고 훔쳐갔다.

둘째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서 아침 시간은 전쟁이었다.챙겨야 할 준비물을 미처 챙기지 못한 날이면 남들보다 더 일찍 움직여야 한다. 전날의 피로가 풀리기도 전에 아침이 밝아왔다. 잠은 하루를 살아낼 에너지 보급원인데 나의 저장소에는 저질의 에너지만 가득 찬 느낌이었다. 시간만 축냈지 아직도 부족하다며 잠이 보내주지 않는 거다. 완충하지 못한 채로질질 끌려 나오면 머리는 지끈지끈 불쾌한 하루를 살아야 했다. 품질 나쁜 배터리를 원망하며 힘겹게 하루를 버텼다. 훼방꾼 잠 때문에 자학도 많이 했다. 잠은 부족한 의지 뒤에 숨어 자신을 얕보았다. 
남들보다 늦은 출발과 낮은 결과를순전히 의지의 문제로 해석했다. 늘 허약한 마음가짐이 말썽이라 부추겼다.

그러던 그가 하루아침에 안면을 바꾼 거다. 가라고 소리칠때는 집요하게 붙들어 놓아주지 않더니 이제는 함께 즐기자애타게 불러도 쉽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내 시간을 점령했던 아이들도 독립했고 쫓기던 일터에서도 밀려나 놀아줄 상대가 절실한 때에, 손만 뻗으면 쪼르륵 달려오던 그가 나쁜남자 콘셉트라니. 어린 왕자처럼 해맑은 얼굴로 무시로 까무러치게 하던 너였는데.

이래저래 애태우긴 마찬가지다. 일방적이기만 하던 서투른연인이다가 이젠 짝사랑의 그대, 어긋난 인연이 아닐 수 없다.엊박자 열정이라고 조롱 말고 부디 자주 들르게 그려. 끓어오르는 정열의 장미 향은 아니어도 바람결에 풀잎 부딪는 소리로 너를 맞으마. 120수 면보에 곱게 뉘고 새벽이 이울도록 놓아주지 않을 참이야. 그러면 까무룩 세상 시름 하얗게 잊히지싶은데. 시나브로 흐린 날도 말갛게 보는 내공이 차곡차곡 쌓일 것 같은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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