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회 중봉충렬제 기념 ‘중봉 학술세미나’가 지난 11일 옥천문화원 문화교실에서 1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됐다.
이날 중봉 조헌 선생(1544-1592)의 학술세미나에는 배천조씨문열공종회 조종용 문중 관계자를 중심으로 김문준 교수(건양대학교, 사.중봉조헌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강보승 교수(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윤리교육과), 이영자 교수(전북대학교 인문대학), 임준목 교수(한밭대학교), 옥천향토사연구회, (사)중봉 조헌선생 선양회, 옥천문화원부설옥천학연구소 등이 참석했다. 중봉 조헌 선생에 관한 올바른 역사적 인식과 향후 연구과제, 중봉 선생을 중심으로 한 충청지역인문정신문화 활용방안 등을 발제하고 토론하는 자리를 가졌다.
배천조씨문열공종회는 중봉 조헌 선생의 역사적 발자취가 사실과 다르게 오도된 것에 대해 지자체, 언론, 각계에서 바로 잡아야 한다고 강하게 지적했다.
옥천 가산사 측은 그동안 임진왜란 당시 중봉 조헌 선생의 의병이 영규 대사의 승병과 가산사에서 훈련했고, 가산사 영정각에 조헌 선생과 영규 대사의 영정이 존재했으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강탈됐다는 설을 제시해 왔었다. 또한 가산사 측은 중봉 조헌 선생에 대한 포럼 등을 개최, 옥천군민과 언론계 등 각계에 인용 전달하고 옥천군에 가산사 인근 도로를 중봉 조헌 선생을 기리는 도로명으로 개정 추진하는 활동도 해왔다.
이에 반발한 조헌 선생 후손인 배천조씨 문중 관계자는 “이러한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역사적 사료와 근거로 제시하고 지난 6월 7일 충청북도와 옥천군에 사실관계 확인 청원을 제기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 가산사에서 주장한 내용은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학계의 확인으로 드러났다.
또한 학계에 의하면, 당시 중봉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견하고 전란 5년 전부터 5회의 상소를 조정에 건의해 대비할 것을 간곡히 청원했다고 전해진다. 왜란이 일어나고 선생은 옥천의 문인들과 임진년 5월 3일부터 의병 모집 활동을 전개, 호서지방에서 1천6백여 명을 모아 7월 4일 공주에서 기병제를 지내고 출정 7월 29일 회덕과 문의를 거쳐 8월 1일 청주성을 공격해 승리했다.
영규 대사 역시 공주 갑사 청련암에서 기병하여 중봉 의병이 청주에 도착했을 때보다 빠르게 영규 대사 의병이 먼저 와 있었다는 역사적 근거가 명확히 존재한다. 따라서 옥천 가산사는 중봉 선생과 의병의 활동 지역과는 전혀 방향이 다르고 왜적이 북상한 상태에서 오히려 남쪽으로 내려와 활동할 이유도 전혀 없었던 상황이었다.
또한, 가산사 측의 중봉 조헌 선생 영정이 있었다는 주장 역시 애초부터 선생의 영정이 존재하지도 않은 가설인 것으로 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가산사의 존재가 불교계가 조사한 지표보고서에 의하면 가산사는 임진왜란 이후인 영조 때 처음 문헌에 등장하는 절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근거가 명확하고, 중봉 조헌 선생의 문중 청원으로 관련 기관과 학계에 사료 바탕으로 검증한 결과, 가산사로부터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이 모두 역사적 근거가 없음을 명확히 확인했다. 해당 기관과 각계에서는 역사적 근거가 명확한 사실로 존재함으로 지금까지 전해진 잘못된 중봉 조헌 선생 관련 내용을 바로 잡는 데 빠른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가산사 측은 이번 49회 중봉충렬제 기념 중봉 조헌 선생 학술 세미나에 참석하지 않았다.
중봉(中奉) 조헌(趙憲, 1544-1592) 선생은 문묘에 모신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한 분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금산 전투에서 순국하여, 고경명, 김천일, 곽재우와 함께 임진 사충신의 한 분으로 불린다.
중봉 조헌 선생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고 순국하신 ‘의를 행한 선비’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 중봉 선생은 애국과 의를 행한 분이다. 그러나 중봉 선생은 단순히 애국과 의를 넘어서 ‘도를 행한 선비’이다. 중봉 선생은 도를 구하는 구도의 자세로 나라와 백성을 구한 분이다.(김문준 ‘중봉 조헌 연구의 향후 과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