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옥천군수(15), 이봉조(李鳳朝) 군수
상태바
조선시대 옥천군수(15), 이봉조(李鳳朝) 군수
  • 전순표 국사편찬위원회 충북 부회장(사료조사위원)
  • 승인 2024.12.12 09: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명문가 출신, 효성은 지극했지만,
옥천군수 시절 탐학, 백성들 떼 지어 곡함

이봉조(李鳳朝) 옥천군수는 1644년(인조 22년)에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1701년(숙종 27년)까지 67세를 살은 조선 중기 문신이며 성리학자이다.


그의 자는 선명(善鳴)이고 본관은 연안 이씨(延安李氏)이다. 문강공(文康公) 저헌 이석형(李石亨)의 7세손으로, 증조부는 월사 이정귀(李廷龜) 선생이시고, 할아버지는 문정공(文靖公) 백주 이명한(李明漢) 예조판서이다.


이봉조 군수는 이조판서 이만상(李萬相)과 어머니 예조판서를 지낸 오준(吳竣)의 딸 동복오씨(同福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두 명을 두었는데, 부인은 관찰사 홍주삼의 딸 풍산홍씨(豊山洪氏)이다. 


효성이 지극, 갑술환국 때 옥천군수

 
이봉조 군수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뛰어났고 10세 때 모친이 심한 열병에 걸렸을 때 의원이 치료하기를 꺼렸으나, 눈물로 청원하는 효성에 감동한 의원이 치료를 해주어 모친의 열병이 나았다. 외조부 오준(吳竣) 판서의 슬하에서 성장하였으며, 학문에 열중하였다.

그는 1669년(현종 10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였다. 관직은 정릉참봉(貞陵參奉)을 시작으로 광흥 봉사(廣興奉事), 상서 직장(尙瑞直長), 호조좌랑, 간성군수 등을 역임했다. 태인현감 재직 시절인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세상이 크게 흔들리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기사환국(己巳換局)은 1689년(숙종 15년) 때 소의(昭儀) 장 씨 소생의 아들 윤(昀)을 숙종은 원자로 삼으려는데 반대한 송시열 등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집권한 일로 일명 기사사화(己巳士禍)라고도 한다. 1694년(숙종 20년) 봄에 발생한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노론·소론)이 재집권하자, 다시 옥천군수(沃川郡守)에 제수되었다.


군수로 탐학, 사간원 파직 요청 불허


그는 1695년(숙종 21년) 10월 28일 자 『숙종실록』에 의하면 “사간원(司諫院)에서, 옥천 군수(沃川郡守) 이봉조(李鳳朝)가 오로지 탐학을 일삼으므로 원망하며 욕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 차고 백성이 열 명, 백 명씩 떼지어 관아의 문에서 호곡(號哭)함을 논하면서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는 옥천군수에 이어 내직인 공조 좌랑(工曹佐郞)과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형조 정랑(刑曹正郞), 익위사 익위, 사복시 주부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자녀는 3남 1녀를 두어, 큰아들은 송벽당(松檗堂) 호조 참판 이정신(李正臣)이고 차남은 이경신(李敬臣), 삼남은 이성신(李聖臣)이다.

봉조 군수의 할아버지 이명한(李明漢)은 대제학과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지냈고 1595년~1645년을 산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는 천장(天章)이고 호는 백주(白洲)이다. 이명한 판서의 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낸 월사 이정귀(李廷龜) 선생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다. 


조부 이명한 예조판서, 척화파


이봉조 군수의 할아버지 이명한은 1616년(광해군 8년)에 대과에 급제, 승문관 정자, 성균관 도서관장 격인 전적(典籍), 공조좌랑 등을 지냈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면서 경연 사독관이 되었고 1624년(인조 2년)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으로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 왕을 호종하여 공주로 피난하였다.

그 후 이명한은 주요 내직인 홍문관 교리, 이조좌랑, 사간원 사간, 부응교, 종부시정, 이조참의, 동부승지, 우승지를 지냈다. 잠시 외직인 남양부사를 역임하고 다시 중앙요직인 부제하, 대사간, 좌승지, 수찬관, 대사성, 병조참의, 도승지를 지냈다.

이후 강원관찰사, 한성부 우윤, 우빈객, 좌빈객 등 여러 조정의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1645년 명나라에 몰래 서신을 교환했다가 청나라에 붙잡혀 갔다가 돌아와서 예조판서을 지냈다. 이명한 판서는 인품이 온유하고 성리학에 밝았고 시와 글씨가 명필이었다.

병자호란 때 모친을 모시고 강화도를 피난 갔었는데 강화도가 청군에게 점령당했다. 그때 한양서 알던 사대부가 가솔을 배에 태워 섬을 빠져나가려 할 때 자신은 죽어도 좋지만, 어머니를 태워 줄 것을 애원했으나 거절당했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친척들이 누구냐 하니, 그 이름을 잊었다고 말했다 한다. 그는 청나라와 화의에 반대해서 만주 선양까지 붙잡혀 갔다. 그때 울분을 노래한 시조 6수가 전해진다.


장남 이정신 시문 능함, 호조 참판 올라


그리고 이봉조 군수 장남 송벽당 호조 참판 이정신은 조선 숙종 때의 문신으로 시문에 능하였다. 송벽당의 자는 아언(我彦)이고 호는 송벽당(松蘗堂)으로 1699년(숙종 25년)에 강릉 참봉으로 정시 문과 급제하여, 정언, 수찬, 응교, 장령, 헌납 등 청요직을 두루 거치었다.

1711년 동래부사, 1716년 병조참의를 거쳐 1721년 호조 참판으로 제수되고 사은 부사로 연경을 다녀와서 도승지에 올랐다. 소론으로서 조태구 등과 노론의 세력을 탄핵하여 축출하였으며, 병조참판을 거쳐 경기도 관찰사와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한 후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로 지목되어 유배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