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미골은 사방이 금강소나무가 빼곡한 산으로 둘러싸이고,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른다. 계곡을 따라 걸으면 크고 작은 집들이 보인다. 크게 지은 집은 펜션이고 작은 집들은 가정집이거나 별장이다. 집들을 지나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면 어성전 산림교육관과 숲속 수련장이 있다.
아름드리 금강소나무가 쭉쭉 뻗어 있는 수련장은 들어서기만 해도 가슴속의 체증이 내려가는 듯하다. 숲 체험을 위한 산책길에서는 사계절 피고 지는 꽃과 산새들을 만나고, 야생화 단지에는 각종 야생화가 있다. 귀 기울이면 물소리, 새소리 등 자연이 연주하는 온갖 소리가 들린다. 숲속 소리박물관 같다.
들미골은 오대산 동쪽 끝자락 양양군 현북면에 자리 잡은 산골 마을이다. 우리 집은 그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이웃의 큰 펜션에 비해 아주 작은 집이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귀여운 집이라고 한다.
집을 보고도 귀엽다는 표현을 하니 웃음이 나오는데, 그 안에는 귀엽다는 표현과는 거리가 먼 초로의 부부가 덤덤하게 살고 있다.
가끔 오디오 볼륨을 높인 클래식 음악과 피아노 연주 소리가 창밖으로 새어 나오면 작은집 주인의 취미를 알게 된다. 피아노로 연주되는 ‘옹달샘’,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라는 동요는 이곳 들미골 피아노 소나타의 서곡이다.
들미골은 사계절의 변화가 빠르다. 봄인 듯하면 이내 매미가 여름을 알리고, 아직 여름인가 하면 텃밭의 고추가 빨갛게 익는다. 붉은 고추를 따서 말리며 가을 정취를 만끽하다 보면 대청봉 정상에 첫얼음이 얼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곧이어 들미골에도 겨울이 오고 그 겨울이 유난히 길어서 봄, 여름, 가을이 짧게 느껴진다.
이른 봄 생강나무 꽃에 때늦은 봄눈이 내리면 하얀 솜 모자를 쓴 듯 귀엽다. 양지쪽 산비탈에는 긴 겨울을 견딘 노랑제비꽃이 낙엽을 들추어 얼굴을 내밀고 바위틈에서도 진달래가 분홍빛을 터뜨린다.
여름이 되면 우리 집 앞 계곡은 왁자지껄하다. 아이들이 들미소에서 헤엄치고 물장구치며 웃고 떠드는 모습이 슈베르트의 ‘숭어’를 흥얼거리게 한다.
들미골 가을은 색다른 풍요로움이 있다. 산에서는 버섯 잔치가 벌어진다. 자연산 송이버섯, 능이버섯, 싸리버섯, 표고버섯 등 다양한 버섯이 나온다. 이 버섯들은 마을 사람들의 소득원이기도 하다.
모두가 잠든 가을밤, 요요한 달빛이 유리창에 머물면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선율이 귓가에 흐르고, 집안 어디에선가 들리는 귀뚜라미 소리가 월광 소나타 1악장 못지않게 애절하다. 귀뚜라미의 달빛 소나타다.
들미골의 겨울은 참으로 길고 하얗다. 지난겨울에는 눈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내 기억에 그보다 많은 눈을 본 적이 없다. 숲속 소나무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에 가슴을 조이고,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키 큰 소나무가 산비탈에 거꾸로 쓰러져 있는 모습이 처절했다.
그뿐 만인가. 먹이를 찾아 산에서 내려온 고라니가 눈에 파묻혀 숨져 있는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내가 따뜻한 집안에서 창밖 설경에 취하고, 눈썰매를 탄 닥터 지바고가 소나무 숲을 헤치고 달려오는 광경을 상상하며 음악을 듣고 있을 때 하얀 숲에는 슬픈 사연이 쌓이고 있었다.
들미골에는 문학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우리 집을 찾아온 글 선배와 문우들이 좋은 글 향기를 남겼다. 수필에 권예자 님의 ‘소나무와 담쟁이’, ‘월궁항아’, ‘어성전의 3박4일’과 한정순 님의 ‘부부 소나무’가 있다.
시인이 남긴 시는 주재남 ‘어성전 구절초’, 김내식 ‘어성전 들미소’, 김청광 ‘들미소’, 이인평 ‘들미소 다녀와서’등이다. 이분들 작품이 명작이어서 어느 문인은 들미골에 문학비를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이들은 들미골과 소곤거리다가 일렁이는 감흥을 가슴으로 연주하고 노래했다.
사계절 숲속 음악회가 열리는 들미골! 교향곡, 소나타, 칸타타 등 연주도 다양하다. 아무리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 자연의 소리다. 물소리, 새소리, 솔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 등 숲속 식구들이 각각 기량을 뽐내고 때때로 들미소가 피아노 소나타를 협주하면 그야말로 들미골 판타지아다.
사계절 변화에 순응하며 자연의 소리를 귀담아듣고 깨닫는 삶이 감사하다. 들미골 소나타를 감상하며 내 삶을 아름답게 가꾸고 자족과 이웃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을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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