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청산은 동학의 메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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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청산은 동학의 메카다(3)
  • 전순표 시인·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19.10.17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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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표 시인·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교주 신원운동과 동학농민전쟁
억울하게 처형된 최제우에 대한 죄를 풀어 달라는 ‘교주 신원운동’이 전개되어서 1892년에 11월에 삼례집회를 열고 1892년 12월 보은 장안에 동학 대도소(본부)를 설치하였고 서울 광화문에서 복합 상소를 결정하고 8월에 상경하여 복합 상소를 탄원하였다.
이어 1993년 3월 10일 옥천군 청성면 거포리 포전마을에서 최시형 교주를 비롯한 전국동학지도부가 구암 김연국 집에서 집회를 갖고 최제우 교주의 ‘조난예식’을 치루며 동학수뇌부는 ‘보은 장안집회’를 결정하여 수만 명의 동학교도들이 전국에서 보은 장안으로 집결하여 보은취회를 갖는다.
1894년 2월 동학의 강경파인 전봉준이 전라도 정읍 고부 백산에서 봉기하여 동학농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전봉준 동학군은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북상하여 4월, 손화중, 김개남이 전남일대를 점령하고 이어 5월 31일 전라도 전주성 감영을 점령하였다. 동학군은 전주 감영에서 탐관오리를 추방하며 외국의 개입에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조정과의 ‘전주화약’ 이후 집강소 설치 등 조정의 ‘페정개혁’에 동의하여 전봉준 동학군은 해산하여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에 놀란 그 당시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구원군을 청하여 6월 7일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였고 바로 일본군은 ‘천진조약’을 빌미로 조선에 군대를 출병시켜 인천 제물포로 상륙하여 서울 경복궁을 점령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난다. 이에 앞서 청나라와 일본 해군은 서해에서 풍도해전을 벌였다
김개남 동학군은 대전과 청주 부근까지 진출하여 관군과 접전을 벌였다. 이 당시 충청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관군의 혹독한 탄압을 받는 동학교도들을 위해 최시형 교주에게 관군에 대항할 것을 빗발치게 요구했다.

△무장투쟁 ‘재기포 명령’ 9월 16일-청성 소서리
그러나 온건노선을 지향하던 그는 마침내 1894년 음력 9월 18일 옥천군(당시 청산현) 소서리 소사동에서 전국 동학교도들에게 일본군과 관군에 무장 투쟁하라는 ‘재기포 명령’을 내린다. 충청도 이북의 동학군은 남진하여 충북 남부지역인 보은과 옥천, 청산, 영동지역에 모여들어 손병희를 통령으로 논산에서 전봉군 남접 동학군과 연합한 23만 5천 명의 동학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과 격렬한 공방전을 치룬다. 그러나 수적 우위에 불구하고 대포와 기관총,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 대패하였고 이어 김제 태인전투에 패해 익산-순창-남원으로 후퇴하다가 11월 순창에서 전봉준이 체포된다.
한편 11월 초에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에서 동학군 1만여 명과 일본군 후비보병부대 2중대와 청주 관군과 함께 대접전을 벌여 증약동학군은 이들을 물리쳤다. 증약 전투 당시 남쪽으로 시오리 떨어진 옥천 읍내에는 5~6만 명의 동학교도들이 모여 있었다. 이어 일본군은 옥천읍 교동리 귀신당 계곡에서 동학군을 처형하고 청성면 화성리 석성에서 동학군 3만 명과 대전투를 벌였고 청산 남부와 옥천 양산(현 영동)에서 전투를 치루며 동학군을 소탕하였다.
전라도 남원에서 재편성한 손병희 통령이 지휘하는 북접동학군은 다시 북상하여 무주를 거쳐 영동-청산- 보은을 거치며 전투를 치루고 보은읍 종곡리 북실전투에서 상주 관군의 기습으로 주력부대를 상실하고 음성 되자니 전투를 마지막으로 최시형 교주 일행은 측근들과 괴산-음성-장호원을 거쳐 강원도 남부 산간지역으로 피신하며 몇 년 후에 체포 처형된다.
동학교도들이 주축이 된 동학농민전쟁은 전국 80개 지역에서 봉기했으며 동학의 339개 포 조직에서 연인원 3백만 명 참가했고 20만 명 이상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동학혁명 영향으로 국내는 근대화로 가는 갑오개혁이 이루어졌고 국제적으로는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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