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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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9)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1.03.18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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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를 노하게 한 논향축소(論香祝疏)

불사에 향을 올리라는 문정왕후의 명을 거절하여 파직된 조헌은 토정 선생을 모시고 서기(徐起) 등과 두류산에서 풍월을 즐기며 한 때를 보낸다.

이때 학민상인(學敏上人)의 운을 받아 지은 시 한 수이다.

樓下寒潭徹底淸 누하(樓下)의 차가운 못 속속들이 맑은데
楓光斜日暎空明 석양에 비친 단풍 밝기도 해라
生逢眞界居無界 살아생전 선계(仙界)에 살길이 없어
鳴咽泉聲若有情 목 메인 샘 소리만 내 뜻 같구나
滿山楓葉爛秋天 온 산 단풍잎 가을 하늘 찬란한데
水石喧邊一路線 물가에 외가닥 길 멀기도 하다
眞界晩來留不得 늦게 찾은 선계(仙界)에 오래 머물 수 없어
碧潭回首倍依然 푸른 못 돌아서니 더욱 섭섭하여라

조헌은 두류산을 떠난 후에 한동안 안면도에 머물렀다.

그 뒤에 스승과 친구들도 찾아보고 산과 강을 벗 삼으며 세상을 주유하다가 때로는 강론을 하면서 한가로이 지냈다.

그가 다시 교서관 저작(著作)에 승진되어 임명된 것은 그다음 해인 1573년(선조 6년) 30세가 되어서였다. 이번에도 궁중에서 향실의 일을 맡아보는 직책이었다.

이미 불사에 향(香)을 봉행하는 일로 왕후의 명을 거절하여 파직된 바가 있었으나 또 다시 그 일을 맡게 된 것이다.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참을 수 없던 그는 저작에 보직되자 또 임금에게 불사에 향을 내리는 일에 부당함을 아뢰는 상소를 올린다.

이것이 논향축소(論香祝疏)이다.

그는 상소에서 자수궁(慈壽宮 인왕산의 왕기를 누르기 위해 설치)과 성수청(星宿廳 무당이 복을 비는 곳)에는 영원히 향(香)을 내리지 말 것과 이러한 건물들이 역대 임금의 위패를 모신 종묘(宗廟 공자를 모신 문묘)와 나란히 배치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신이 주상의 귀를 여러 번 모독하게 하는 미안함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입으로는 성현의 글을 읽으면서 부처에게 공양하는 향(香)을 손수 주는 일은 신이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다.

또한, 종묘(宗廟), 문묘(文廟),자수궁(慈壽宮), 성수청(星宿廳)이 모두 횡으로 열을 지어있어 대체로 차등이 없는 것도 신은 참을 수가 없는 바입니다.

그리고 한 번 청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갑자기 우리의 임금이 할 수 없다고 말하면 전하께서 잘못된 곳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도 신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이에 금일 자수궁에 봉향해야 할 향을 아래로는 물의가 비등할까 두려워하고 위로는 성스러운 정치에 누를 끼칠까 두려워서 감히 나아가 봉향하지 못하고 공론이 정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록 그 내용이 틀리지는 않았다 하여도 상소를 받은 선조는 크게 노하여 조헌을 문초하고 극형에 처하려고 했다.

어명으로 그의 잘못을 물었으나 그래도 조헌은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았다.

이에 선조는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국문(鞫問)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역시 그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이때 조헌을 극형에 처하려고 하자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와 조정 대신들이 들고 일어나서 극구 반대함으로써 간신히 벌을 면하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조헌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그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을 막론하고 일반 백성에 이르기 까지 그와 사귀기를 원했다.

박순(朴淳), 소제(蘇齊), 류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이발(李潑), 홍사신(洪司臣), 윤선각(尹先覺), 정여립(鄭汝立) 등 당시의 명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장차 국가의 안위가 조헌에게 달려 있다고 할 정도였다.

이로서 바른 말을 서슴치 않는 그의 곧은 성품이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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