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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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45)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2.03.10 10: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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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사실을 당장은 학생과 동문에게 알리지 않고 먼저 교수와 동문회장한테만 학교가 비상임을 알렸다. 나는 그날 밤새워 복지부 이성호 장관께 올리는 글을 썼다. NMC의 역사성, 즉, 스칸디나비안 3국의 재정으로 설립된 학교로 정부의 필요에 따라 폐교를 쉽게 할 수 있는 학교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NMC 간호대학은 우수성과 탁월성으로 4·19혁명, 월남전, 아웅산 사건, 강원도 콜레라 사건 등 국가의 위기와 재난 때마다 국립대학으로서의 기여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점들을 들어 폐교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바로 내년 신입생 모집 중단을 시작으 로 국립의료원 이전계획의 부당함 등을 핵심으로, NMC 간호대학 존립의 정당성을 탄원하는 탄원서를 써서 김숙자 동문회장과 함께 복지부 고위공무원단과 장관실을 방문하여 설득작업을 펼쳤다. 

그렇게 모두가 노력한 결과 간호대학 폐교 계획은 무산되었고 국립의료원 이전 계획에 간호대학을 포함하는 것으로 결론 지어졌다. 무엇보다도 발 빠르게 적극적으로 복지부 장관 및 관계자들을 설득함으로서 학교 존립 위기를 막아낼 수 있었다. 십년감수란 말이 바로 이런 일이었다.

삼성이 간호대학 인수하기를 적극 원했건만…

95년 간호협회 이사회에서 만난 삼성의료원 이정희 간호이사가 내게 말했다. 

“우리 삼성의료원이 국내 처음 보호자 없는 병원을 계획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그런 병원이 없어서 어려움이 있습니다. 옛날 NMC는 그런 경험이 있는 병원 아닌가요?”

“두말할 것 없지요. NMC는 58년부터 보호자 없는 병원으로 간호사가 토털케어를 하는 외국병원 시스템을 구축해 와서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그에 대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지요.”

“삼성과 NMC 간호대학이 만나면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이 업무담당 삼성 전무를 한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겠어요.”

그 제의에 나도 좋은 생각이라고 약속을 잡자고 하면서 시작된 건이었다. 며칠 후 바로 삼성에서 연락 와서 삼성의료원으로 갔다. J 전무를 비롯해 병원 간부들이 반갑게 맞으며 삼성의료원에 대한 오리엔테이션, 향후 발전계획에 대한 브리핑을 정식으로 한 다음 삼성의료원 주요 부서를 라운딩하면서 설명을 해주었다. 그때 당시 설명에서 삼성의 간호대학 설립 운영에 대한 적극적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질 높은 간호 인력을 양성하여 삼성의료원에 자체 인력을 공급하고 우수한 간호 인력이 국내 유일의 「보호자 없는 병원」을 표방하여 앞서가겠다는 야심에 찬 계획이었다. 그러면서 J 전무는 말했다.

“우리는 간호대학을 통해 돈을 벌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우리는 국내 최고가 아니라 세계 일류의 간호대학을 만들 것입니다. 삼성 의료원 맞은 편에 간호대학부지도 확보되어 있어 금방이라도 학교 건물을 지을 수 있습니다. 간호대학을 설립한 후 곧이어 의과대학도 만들 것입니다.”

삼성의 프리젠테이션을 듣고 나니 역시 삼성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초일류의 간호대학을 만들겠다는 의지와 투지가 무엇보다 내 마음을 끌어당겼다. 게다가 의과대학까지 설립하면 금상첨화일 것이었다. 나는 우리 NMC가 북유럽 의료시스템으로 운영되어온 간호시스템의 노하우를 일류로 지향하는 삼성과 접목한다면 말 그대로 내가 꿈꾸는 멋지고 훌륭한 간호대학을 만들 수 있겠다는 꿈과 확신이 섰다.

나는 교수회의에서 내가 보고 들은 삼성의 계획을 브리핑하고 교수들도 직접 삼성 임원을 만나 상세한 계획을 듣고 상호 질의응답도 가질 기회를 만들었다. 삼성 측은 적극적으로 차량을 지원해서 교수들을 삼성의료원에 픽업해서 만남의 기회를 만들고 또 점심시간이 되어 삼원가든에서 우리 교수들과 식사도 같이 하면서 대화의 폭을 넓혀갔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내가 구상한 일들을 하나씩 준비해 나갔다. 먼저 보호자 없는 병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임상 간호교육 시스템이 필요했고 이는 북유럽 간호교육시스템 하에서 스칸디나비안 간호사들로부터 교육받은 리더가 핵심이었다. 나는 부랴부랴 내 1년 선배인 C 선생님을 만났다. C 선생님은 철저한 NMC 간호교육을 받고 스칸디나비안 간호사가 잔류하던 시절 실습을 한 선배로서 그 후 의사인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가서 그곳에서 17년간 임상 전문간호사로 근무했던, 미국에서 도 베테랑 전문간호사였다. 게다가 영어까지 완벽하니 외국병원과의 교류에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C 선생님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무조건 삼성의료원에 보호자 없는 병원운영이 가능하겠냐고 물었다. 

“하면 되지 못할 것 뭐 있어요?”

역시 C 선생님의 첫 마디에서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럼 됐어요. 혹시 그런 기회가 온다면 그 일에 앞장서 일해줄 수 있으시겠어요?”

확답을 듣고 가장 큰 숙제가 해결된 듯했다. 그런 다음 나는 수시로 삼성 J 전무와 소통하면서 세부적인 사항을 논의했다. 가장 중요한 교수들의 관심 사항인 교수 인사 건도 교수 전원이 그대로 가는 것으로 합의하고 그 사실을 교수들에게도 알렸다. 그렇게 하나씩 한가지씩 세부적인 것을 논의하고 합의해가며 내 포부에 맞는 학교의 큰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러는 한편 나는 미국 UCLA에 한 학기 초빙교수로 가게 되었다. 물론 내 전공인 아동 간호학 연구를 위한 것이었지만 계획은 따로 있었다. UCLA에 가서 있는 한 학기 동안 임상에 나가 간호부장과 함께 간호시스템을 둘러보고 행정직원도 만나 그 당시 국내에는 아직 도입되지 않은 간호사들의 파트타임 제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직접 공부한 것이다. 어떤 것은 과별로 병동에 붙어있는 안내지까지 한 장씩 모아 보호자 없는 병동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안내서 및 정보지 등 자료를 잔뜩 수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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