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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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59)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2.03.17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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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 죽이나 정사로 죽이나 살인은 마찬가지

영남의 명사들과 시(詩)로 교우하다 

12월 27일에는 청도군 서쪽 십리 밖에 있는 탁영(濯纓) 김일손(1464~1498)) 선생의 사원을 찾았다. 이곳이 곧 김일손의 집터였다. 탁영 선생은 김종직 선생의 문인으로 춘추관 사관(史官)을 지냈으며 조의제문(弔義帝文) 사건에 관련되어 무오사화(戊午史禍)에 처형되었다. 어촌 선생의 사위 이태숙과 더불어 애도하고 벽 위에 걸린 시(詩)에 차운하여 ‘탁영 김일손 선생 사원에서(濯纓先生祠院)’라는 시 한 수를 남겼다. 

百年遺事問悠悠 백 년 전의 일 묻기가 아득한데 
綠竹蒼松繞故丘 푸른 대나무 푸른 솔 언덕을 덮었네
絶學要須開日月 끊긴 학문 해와 달이 열리기를 기다려야 할지니
微言非是續陽秋 성인의 말씀 옳고 그름이 춘추(春秋)를 이음이라
京生只爲劉哀惜 경생(京生)은 다만 한나라가 쇄함을 애석해 하는데
石氏寧思黨禍謀 석 씨(石氏)는 어찌 당화(黨禍)를 꾀하기 생각하는가
萬古험人眞戱劇 만고의 간교한 인간들 참으로 장난이 심한데
誦詩懷古淚先流  시를 읽으며 옛 생각에 눈물이 먼저 흐른다

12월 28일에 합천(陜川)으로 향했다. 합천에는 남명(南冥) 조식 선생의 생가가 있고 신라시대 문장의 대가인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이 만년에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머물며 저술활동을 한 곳이다. 

합천으로 가는 길에 진주목사 최립(1539~1612)에게 절구(絶句) 5수를 보낸다. 그런데 이 시를 살펴보면 두 분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그가 보낸 다섯 수의 시는 “그가 진주로 부임하며 옥천을 지나가는 길에 참문(參聞) 하지 못함을 한(限)하며”를 비롯하여 “옛날을 추억하며 가슴 아파함”, “감사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적음”, “옛일을 기록하고 지금을 생각함”, “세상 사람들이 사설(邪說)에 미혹됨을 탄식함”이란 다섯 수이다. 여기에서 두 분의 관계를 짐작하기 위해서 먼저 최립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립은 조헌과 같은 시대를 살아온 문인 겸 문신으로 호는 간이(簡易), 본관은 통천(通川)이다. 선조 때에 8대 문장가로 시에도 능했고 외교문서의 대가로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율곡의 문인이며 명종 16년에 식년 문과 장원으로 급제했다. 주청사의 질정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고, 1587년 진주목사로 외직에 전임되어 6년을 재임한다. 중봉이 절구 5편을 보낸 시기가 바로 진주목사로 재임하던 때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 9월에 전주부윤으로 나갔다가 1594년 세자 책봉을 위한 주청사(奏請使)의 부사로 정사 윤근수와 또 한 번 명나라를 다녀온다. 이후에 형조참판과 동지중추부사 겸 승문원제조를 지냈다. 문집으로 간이집(簡易集)이 있고 그 외에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능력은 뛰어났으나 가문이란 벽이 그를 크게 기용하는데 제한이 되었다고 한다. 중봉집에서 두 분의 관계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는 없으나 중봉의 시에서 각별했던 관계를 유추해 본다.

 官罷無歸住管山 벼슬을 떠나 돌아가지 않고 관산(옥천)에 머무르니
鄕關迢遰道途艱 고향땅 아득히 멀어 가는 길이 험난하네 
西亭一過無消息 서정을 한 번 지나고 소식이 없으니
想認吾耕畿縣間 내가 경기도 고을 사이에서 농사짓는 줄 아셨으리
그가 진주로 부임하며 옥천을 지나가는 길에 참문(參聞)하지 못함을 限하며
 延津江上追陪日  延津江 가에서 따르며 모시던 날 
矗石樓中獨坐時 촉석루 안에서 홀로 앉아 있을 때
十載風霜愁幾許 10년 바람 서리 시름은 얼마던가    
令人憶者鬢成絲 옛 추억에 귀밑머리 실같이 세었네
옛날을 추억하며 가슴 아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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