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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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77)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2.08.11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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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조 제독(趙提督)은 성인(聖人)이다

옥천에 은거하면서부터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람 중의 한 분이 문인 전승업이었다. 그는 조헌 선생의 후율정사(後栗精舍)가 마주 보이는 건너편 산 아래 인봉정사(仁峰精舍)를 짓고 학문을 익히고 시국을 논하며 조헌 선생과 함께했다. 조헌 선생이 옥천에서 지낸 8년의 세월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들이 계속 일어난다. 그때마다 전승업은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그가 청참왜사소(請斬倭使疏)와 비왜지책(備倭之策)등을 상소하고 김포 선영을 다녀서 옥천에 내려와 전승업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 서신이 인봉유고(仁峰遺稿)에 전해온다.

<중봉(重峯) 선생이 전승업에게 보낸 회신(1591년 윤 3월 19일)>
 
요즈음 김포에서 돌아와서 보낸 혜문(惠聞)을 받고 세 차례 반복하여 읽고 감탄했으며 오늘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은데 우중(雨中)에 어떤 사람이 절 밖에서 기척이 있었으니 이는 바로 우리 효선(孝先, 전승업의 字)의 노복이구려. 소매 속의 서찰을 내어주기에 살펴보니 권권(眷眷, 사모하는 모양)이 초청하는 뜻이 있기에 시름없는 모습으로 감개했음을 어찌 다 말하리오. 바로 오늘의 기거(起居)가 모두 편안함을 알게 되니 기쁨과 위로가 지극합니다. 지난날 낮에 그대의 이웃 사람에게 전유(傳諭, 임금의 유지를 전함)하지 못함이 한이 되나 인하여 봉의(奉疑)를 천석(泉石)의 가운데에서 얻었고 잠만 깨면 탄식이니 어쩌리오, 어쩌리오. 헌(憲)은 어른을 모시고 아직은 보존하고 있으나 다만 세상이 부질없이 근심하는 까닭에 시대와 세상이 꺼려하는 것을 접촉하니 남은 환란이 언제 박두할지 모르겠구려. 더구나 자식을 평안도로 가게 했으니 이처럼 어려운 때에 부자가 이별하려니 그 민망함을 어찌 다 말하겠소. 여기 절에서 친구와 같이 정회를 펴고 돌아가는 길에 김도사(金都事)를 찾아보고 저물녘에나 군(郡)으로 돌아가니 내일 모레 사이에 혹 여가가 있으면 여헌(汝獻)의 병문안을 하고 고병(高屛)에 나아가 정회를 펼까 하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자식과 작별한 뒤에 한 번 인봉(仁峰)을 방문하리다. 하늘을 우러르니 형옥성(熒惑星, 화성, 재화나 병란의 징조를 보여준다는 별)이 겨우 미기(尾箕, 미성)의 자리를 금방 떠나 방금 남두(南斗, 남쪽 하늘에 있는 여섯 개의 별)로 들어갔으니 이와 같은 중벌(重罰)은 운수(運數)인지 모르겠으나 끝내 1년을 보존토록 환난이 없으리오. 억조창생이 장차 어육(魚肉)을 면할 수 없음이 두려우니 괴롭고 괴로운 일이오. 집을 건축하는 일은 아마도 시급한 계획이 아닌가 하오.

아들 완도가 평안도로 출발하기 직전에 쓴 서신으로 보인다. 전승업에 대한 고마운 뜻과 먼 길을 떠나는 아들 완도에 대한 어버이의 정이 담겨 있다. 그리고 장차 환난으로 겪을 백성들의 고통과 나라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하다. 

아들 완도를 평안도로 보낸 조헌은 속리산에 있는 작은 절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 절에는 지현(智玄)이란 중이 있었다. 그가 조헌의 일상을 살펴보니 잠을 자지 않고 아침을 기다리는 날이 십여 일을 계속했다. 어느 날 저녁에는 밤이 새도록 홀연히 엎드려 슬피 울면서 조반을 드려도 드시지 않는 것이었다. 지현이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었으나 대답을 하시지 않았다. 그 뒤 며칠이 지나서 지현에게 이르기를 “지난밤에 성진(星辰)의 변괴가 몹시도 심했으니 시사(時事)를 가히 알만하다. 내 어찌 슬프지 않으랴” 하고는 소리 높여 통곡하니 중들은 모두 미친 사람으로 생각할 뿐 아무도 왜변(倭變)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왜란이 일어난 후에 일이다. 안방준(安邦俊)이 자부인 박종정(朴宗挺)과 월출산 도갑사(道岬寺)에 갔었다. 그 절에서 70이 넘은 지현(智玄)이란 중을 만났다. 지현이 탄식을 하며 말하기를 “조 제독(趙提督)은 성인(聖人)이다. 당시의 사대부들의 애군우국(愛君憂國)이 모두 조 제독만 같았던들 국사가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르렀겠는가”라고 한탄을 하였다. 안방준이 그때의 일을 그대로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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