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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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91)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2.11.24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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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치지 않는 순찰사를 책망하다

조헌은 순찰사 윤선각이 안세현의 농간에 넘어가 의병에 나온 가족들을 잡아 가둔 사실을 알고 일도의 군권을 쥔 순찰사로서 전투를 회피하는 처사를 질타한다. 그는 윤선각에게 편지를 보냈다. 백성들이 힘을 합하여 싸우라는 임금의 교서가 내렸음에도 의병모집을 방해하고 심지어 왜적을 치지 않고 회피하는 까닭을 물었다. 

여호서순찰사 윤선각(與湖西巡察使 尹先覺)’
 
헌(憲)은 아뢰옵니다. 여러 날을 이곳에 머물렀으나 일대(一隊)의 군사도 응모해오지 않으니 소우(疎迂)한 서생(書生)들은 진실로 저 왜적(倭賊)을 가히 죽이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알고 있는가 봅니다. 저의 분만(憤懣)한 뜻으로는 저 백성들의 분발(奮發)하는 힘을 합하여 싸운다면 곧 산천의 귀신들도 하늘의 노하심을 마땅히 도우리라고 생각합니다. 임금님의 애통한 교서(敎書)가 내렸음에도 그 명령을 받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앞서 왜적의 방어에 대하여 회인(懷仁)과 옥천(沃川)에 나아가 둔병(屯兵)을 하자고 청한 것은 저 한 사람의 사사로운 계책이 아니라 호서 지방(湖西地方) 백성들의 동일한 소원(昭媛)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사(府使), 목사(牧使), 참좌(參佐)들도 또한 그곳으로 진군하여 수비 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합하(閤下 정일품 벼슬아치의 높임말)만은 혼자서 무슨 마음으로 시시한 서생들의 고자질하는 말만 믿고 적병의 칼날이 회인과 옥천을 두루 엿보게 하여 장차 온 호서 지방으로 하여금 모두 왜적의 점거지(占居地)가 되게 했습니다. 

합하는 왜 지모(智謀)를 이렇게 아름답지 못하게 하여 적들을 양성(養成)해주고 국가에 대한 염려는 소략(疏略 꼼꼼하지 못하고 엉성함)합니까? 합하의 생각으로는 부장(副將)만으로 군병을 영솔(領率)하게 하여도 능히 이 왜적을 대적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장들은 명령을 받고도 오래 있다가 이제야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험애(險隘)한 산천은 이미 저 왜적들로 하여금 먼저 점거하게 했으니 이것이 과연 도주(道主 순찰사)의 영(令)을 쓴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탄식할 일입니다. 조정의 명령은 한 도(道)에서 행하지 못하고 도주(道主)의 명령은 부장에게 행하지 못하여 나라가 위급하게 망하는데도 까마득히 생각을 아니합니다. 만일 이 왜적이 평탄한 길로 몰아닥친다고 하면, 무슨 계책으로 방어하시겠습니까?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헌(憲)은 군중(軍中)에 떠도는 말을 두루 들으니 만인(萬人)의 입에서는 한결같이 왜적을 죽이고자 합니다. 그러나 징병(徵兵)을 시작한 지 이미 여러 달이 되었어도 관속(官粟 나라의 곡식)을 소비해 가면서 양성해온 수 천 명의 사졸들은 강(江)을 경계로 하여 자위(自衛)만 하고 비장(裨將)한 사람을 보내서 왜적 하나 참살(斬殺)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합하는 그저 이러고 있기만 하니 민생이 모두 어육(魚肉)이 된 다음에야 한 번 싸워볼 작정입니까? 이미 토적(討賊)도 미처 못하고 또 근왕에도 뜻이 없어 다만 한낱 서생의 의논만을 믿고서 충신과 의사들의 기세(氣勢)를 억제하고 있으니 합하의 뜻 두시는 바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약관(弱冠)에 합하를 받들고 놀았습니다. 이제는 다 같이 백발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친분을 어찌 쉽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환난(患難)에 임하여 말씀을 다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루(鄙陋)한 말씀이 너무나 직언이었으므로 합하의 노여움을 범할까 두렵습니다. 하지만 천 사람의 옳다는 말이 결국에는 한 선비의 곧은 말씀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넓으신 아량으로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시옵기를 엎드려 바라옵니다.

이와 같이 조헌이 순찰사를 책망한 사실을 선조 수정 실록(선조 25년 6월 1일 자)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왜병이 성주(星州), 무계현(茂溪縣)으로부터 금산(錦山), 지례(知禮), 지경을 경유하여 무주 용담현으로 들어와 금산에 진을 치고 있다가 충북 옥천, 영동의 여러 고을로 들어가 청주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사방으로 나아가 방화하며 노략질하였다. 그러나 충청감사 윤국형(尹國馨 윤선각)과 병사 이옥(李沃)은 군사를 모아 방위만 하면서 감히 진격하지 못하자 조헌(趙憲)이 국형(선각)에게 편지를 보내어 머뭇거리면서 적을 치지 않는 것을 책망하니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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