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현(혹은 침현)과 관산성 전투와의 관련성
상태바
탄현(혹은 침현)과 관산성 전투와의 관련성
  • 이주우 옥천향토사 연구회 회원
  • 승인 2022.12.15 13: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의자왕 20년,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 공격 시 신라와 당을 막기 위해 의자왕과 신하들의 회의에서 좌평 의직과 달솔 사영의 방어책에 대해 왕은 주저하면서 어느 말을 따라야 할지 몰랐으나 귀양 간 흥수 말과 흥수 말을 불신하며 말한 대신들의 말을 듣고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이들의 말에 무슨 차이가 있어 의자왕이 결정했는지 비교해 보았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군신들을 모아 공격과 수비 중에 어느 것이 마땅한지를 물으니 좌평 의직이 나서서 말하기를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바다를 건너왔습니다. 그들은 물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배를 오래 탄 탓에 분명 피곤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상륙하여 사기가 회복되지 못했을 때 급습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사람들은 큰 나라의 도움을 믿기 때문에 우리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만일 당나라 사람들이 불리해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주저하고 두려워서 감히 빨리 진격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당 군사와 결전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달솔 상영 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왔으므로 속전하려 할 것이니 그 서슬을 당할 수 없을 것이며 신라 군사들은 이전에 여러 번 우리 군사에게 패하였기 때문에 우리 군사의 기세를 보면 겁을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으로는 당나라 군사들이 들어오는 길을 막아서 그들이 피곤하여지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 군사가 신라 군사를 쳐서 예봉을 꺾은 후에 형편을 보아 싸우게 하면 군사를 온전히 유지하면서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라고 하니 왕이 주저하면서 어느 말을 따라야 할지를 몰랐다. 

여기서 좌평 의직과 달솔 상영은 신라군과 당군에 대해 추상적인 분석하여 의직은 당군과 먼저 결전하자는 의견과 상영은 당군을 막으면서 신라군을 먼저 치자는 의견을 제시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떻게 막거나 공격하자는 대안이 없어 의자왕이 어떠한 결정을 못 한 것 같다. 이때 좌평 흥수는 죄를 지어 고마미지현에서 귀양살이 하고 있었는데, 왕이 그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다. 흥수가 말했다. “당나라 군사는 숫자가 많을 뿐 아니라 군율이 엄하고 분명합니다. 더구나 신라와 함께 우리의 앞뒤를 견제하고 있으니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마주하고 진을 친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백강(혹은 기벌포)과 탄현(혹은 침현)은 우리나라의 요충지로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도 만 명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니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선발하여 그곳에 가서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면서 대왕께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든든히 지키면서 그들의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피곤하여질 때를 기다린 후에 분발하여 갑자기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대신들은 이를 믿지 않고 말했다. “흥수는 오랫동안 옥중에 있으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 말을 따를 수 없습니다. 차라리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강흐름에 따라 배를 나란히 가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가서 소로를 따라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합시다. 이때가 되어 군사를 풀어 공격하게 하면 마치 닭장에 든 닭이나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왕은 이 말을 따랐다.’

반면 귀양 간 좌평 흥수는 신라와 당군에 대해 분석 후 넓은 들에서 싸우면 안 되고 백강(혹은 기벌포)과 탄현(혹은 침현)은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도 만 명을 당할 수 있는 요충지라 이곳에서 적을 막으며 지연작전 후 물자 및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가 피곤할 시 공격하라는 대안, 즉 백강과 탄현에서 막으라는 보다 구체적인 제안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은 흥수의 제안한 장소가 전에 이 지역에서 승리한 전쟁 경력이 있는데 흥수가 제안한 방어책(탄현(혹은 침현)에서 방어하라는 방법)이 그때의 작전과 일치하지 않으므로 구체적인 제안에도 불신하고 “오랫동안 옥중에 있으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비난까지 했다. 그리고 그때 승리한 구체적인 작전으로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가서 소롯길을 따라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하고 그때 군사를 풀어 공격하면 신라군은 닭장에 든 닭이나 그물에 걸린 고기가 된다고 보다 구체적이면서 승리하는 말을 하니 의자왕은 이 말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660년 이전에 탄현을 중심으로 실제 전쟁이 있었고 일본서기와 옥천 황골전설, 백골산(성)의 지명, 대전의 소태 고개 전설과 핏골 전설로 실제 전쟁이 관산성 전투로 보았고 여기서는 간단한 설명만 하고 관산성 전투의 전개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알아보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