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란 순절 충신, 권희인 옥천군수
상태바
임진란 순절 충신, 권희인 옥천군수
  • 전순표 옥천향토전시관장
  • 승인 2023.04.13 11: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용장 권희인 옥천군수 순절
 
조선왕조실록 1593년(선조 26년) 12월 3일자 첫 번째 기사의 좌의정 윤두수가 선조께 임진왜란 전황 보고를 하길 주상께 이르기를 “변방의 장수와 수령 가운데 공적이 현저하여 칭송할 만한 자는 없는가?” 하니, 아뢰기를, “한명련이 제일 잘 싸웠다고 합니다. 권희인(權希仁)도 잘 싸운 사람인데 적탄을 맞아 죽었고…”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선조실록 1595년(선조 28년) 2월 6일 첫 번째 기사에서 정경세가 아뢰기를 “권희인은 자원하고 나서서 적을 치되 종시 혈전하였다. 그는 왜군의 성에 먼저 오르는 등 용맹을 날려 여러 번 전공을 세우고 싸움에서 죽었으니 역시 장부라 할 만하다”. 김응남이 아뢰기를 “이같이 뛰어난 사람은 별도로 포상을 해야 합니다.”

권희인에 팔거․팔랑현 파수장 맡겨
화승총 무력, 새벽 기습감행 대승

 
병마절도사 김시민(金時敏) 장군은 권희인 옥천군수를 영호남의 전략 요충지인 팔거현과 팔량현 고개 두 곳을 방어하는 파수장이라는 중책을 맡겼다.

1593년(선조 26년) 음력 7월 14일 밤하늘에서 장마 비가 오래도록 내리는데 군졸 변성곤이란 자가 진주에서 와서 말하기를 어제 저녁 삼경이 끝나갈 즈음에 독산현 고개를 지나면서 보니 멀리 1리쯤에서 불빛이 있는 가운데 수천의 왜적이 장작을 태우면서 둘러앉아 총수가 시험 발사를 하는데 화약이 비에 젖어 두 번이나 작동하지 않았다고 하자 권희인 군수는 팔을 치켜들면서 “지금이 바로 습격할 기회다”하고 뿔나팔을 불어 세모진 철퇴를 들고 정예 장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북쪽 뒤편 고개를 넘어 날이 샐 무렵 독산현 고개의 적 진영을 급습한다, 적 왜군은 전혀 모르고 자다가 놀라 아우성치며 미처 전열도 갖추지 못했다

삼릉철편 휘둘러 선봉․병사들 일당백
 
용장 권희인 옥천군수는 무게가 수십 근 나가는 삼릉철편을 휘두르며 앞장서서 성낸 말을 몰아 맨 먼저 돌격하니 사졸이 용기를 얻어 일당백이 아닌 사람이 없이 적(왜군)을 격살하여 거의 전멸시키고 그 왜군 우두머리 평소길(平素吉)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은안장과 칼, 탄약, 식량 등 노획한 군수물품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사람들은 군사가 다시 일어난 후의 전공으로는 권희인(權希仁) 옥천군수가 으뜸이라고 했다.

용장 권희인 군수 신출귀몰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해 10월(양력 12월) 초4일에 나무수풀 속에서 적(왜군)의 총포소리가 갑자기 나더니 성 위에서 성을 지키던 우리 사졸이 탄환을 맞아 쓰러진다. 권 군수는 굳게 지키며 교전치 말 것을 명한다.  그러나 이미 수천의 적들이 크게 들이닥쳐 성을 몇 겹으로 포위 하고 개미떼처럼 기어오르는데 탄환과 돌이 비오는 듯 날아왔다.

용장 권 군수는 노약자는 엎드려 피하라 이르고 정예 병사를 선발하여 성문을 열고 철편을 휘두르며 싸우는데 신출귀몰한 장수 좌우로 휘둘러 치는 것이 마치 사납게 부는 바람과 불과 같았다. 적은 초목처럼 바람에 쓰러지며 감히 그 예봉에 맞서지 못했다.

또한 몰래 기병을 보내 적의 배후로 나가 소굴을 불질러 버리게 하니 적은 마침내 어지럽게 흩어져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문단평에 이르러 왜군의 목을 베어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적은 자기들끼리 짓밟고 죽은 자들의 주검이 들판을 가득 메웠는데도 멀리 도망쳐 달아나느라 정신이 없었다.

옆구리 총상, 포위망 뚫고 진중귀환  
 
용장 권희인 군수는 치열한 격전 끝에 적(왜군)이 달아나자 북을 울리고 잠시 갑주를 풀고서 돌아오는 사이에 부상당한 왜군이 수풀 속에 잠복해 있다가 갑자기 탄환을 발사하여 그 조총 탄환이 권희인 충신의 왼쪽 옆구리 관통하여 심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권희인 군수는 말에서 떨어졌다가 다시 오른 것이 수차인데 왜적 무리가 둘러싸고 겁박하자 눈을 부릅뜨고 크게 꾸짖으며 또 왜군 10여 명의 목을 베어 버렸다. 

옆구리 관통상 총알 독 번져 순국  
 
관아에 돌아와 탄환의 독이 크게 번지자 수하의 비장(裨將)에게 명하여 깃발과 북을 가지런히 세우게 하고 뜰 아래로 내려가 북쪽의 임금을 향해 네 번 절하고 두보의 시 “이기기도 전에 몸 먼저 죽으니”라는 ‘촉상’ 구절을 읊조리니 눈물이 비오는 듯하였다.

마침내 웅천전투의 군중에서 이같이 순절하니 때는 1593년(선조 26년) 양력 12월(음 10월) 3일 이었다. 그 때 충신 권희인 옥천군수의 나이는 겨우 36세였다.

임진왜란 때 옥천군수를 지낸 순절충신 권희인 군수와 혁혁한 공훈으로 군수를 지낸 박춘무 청주의병장, 이봉 상주의병장, 이축 문경의병장에 대해 옥천군수로서 국난에  몸 바친 그 정신을 계승하는 학술대회와 기념행사를 통해 그 업적을 재조명하고 선양해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