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성 전투의 전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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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성 전투의 전개(5)
  • 이주우 옥천향토사 연구회 회원
  • 승인 2023.09.07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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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덕왕의 관산성 재점령 및 영동 공격-2

옥천 구진벼루 옆에 ‘염쟁이들’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시신를 염한 곳이라해서 염쟁이들이라 했다. 보통은 전쟁 후라도 시신은 수습을 해주는 것 같은데 이곳에서는 그만큼의 신라군의 희생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항골(항곡리)쪽 전투에서 살아남은 신라군은 어떻게 되었을까. 삼국사기 탄현이야기, 백골산 지명, 대전시 동구 직동 핏골 전설 및 직동의 소태고개 전설을 참고하고 주변의 산성(국사봉보루, 대정리산성, 사현성, 백골산성, 갈현성, 능성, 질현성, 질현성 1-6보루, 우술성, 개머리산성, 마산동산성) 및 멀리는 웅장성으로 추정되는 호점산성 및 금강 넘어 가호리, 후곡리쪽의 산성을 감안하여 추정한다면 대전지명지에  대전시 동구 직동, 핏골은 백제와 신라군이 싸워서 피가 내를 이루었다하여 피골이라 하였다. 

직동의 소태고개은 백제군사들이 노고산성에서 군량을 운반하려 나왔다가 신라군과 마주쳐 싸웠으며 이 싸움으로 시체들이 사태(沙汰)가 나서 ‘사태고개’라고 부른데서 유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핏골과 소태고개에서 백제군과 신라군이 싸웠다는 전설과 황골에서 살아남은 신라군은  국사봉보루, 대정리산성, 사현성, 백골산성, 신선봉 보루, 갈현성, 능성, 질현성, 고봉산성, 질현성 1-6보루, 우술성(계족산성), 개머리산성, 마산동산성등 주변이 성으로 빙 둘러 쌓인 신하동 부근(대청댐으로부터 수몰지역)에서 사진과 같이 백제군이 항시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머물렀을 것으로 생각되고 이는 삼국사기의 표현대로 ‘닭장에 갇힌 닭, 그물에 걸린 고기’ 신세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갇힌 신라군은 여러 방향으로 탈출구를 찾았을 것이나 사방이 산성이라 탈출로를 찾지 못하는 과정에서 삼국사기에 554년 10월 고구려군이 공주(웅천)을 공격한다. 

백제 입장에서 고구려의 웅천 공격은 부여, 공주, 화인진으로 연결되는 금강의 백제보급로가 차단되는 상황이고 전 왕도였던 공주의 전략적인 가치를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 갇힌 신라군은 공주쪽으로 고구려군 공격 소식은 금강을 넘어 공주쪽의 고구려와 합류하는 것이 옥천쪽으로 가는 것보다 더 안전 것으로 생각한 신라군이 금강을 넘어 고구려군과 합류하려고 했을 것이다.

신라군은 금강을 넘기 위해 탈출하다가 개머리산성과 마산동산성 사이 소태고개와 대전시 동구 직동 핏골에서 전설에 의하면 전멸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르뱅이재(침현)를 경유한 가짜 위덕왕의 탈출은 관산성에 있는 신라군을 최대한 밖으로 빼내어 관산성의 방어력을 약화시킨 후 관산성을 재공격하여 신라군의 주력을 괴멸시킨 후 상주 또는 경주까지 공격하려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관산성 재공격의 중심은 식장산이고 독수리봉산성에서 할아비산성의 능선에 있는 석축을 보면서 위덕왕이 관산성 재공격 초기에는 할아비산성에까지 와서 항골(항곡리)의 가짜 위덕왕 철수과정과 신라군의 추격과정을 보면서 가짜 위덕왕을 추격하는 신라군에 대한 공격과 관산성에 대한 재공격을 내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삼국사기 탄현(침현)의 기록은 660년까지 백제 땅이었음을 의미하니 가르뱅이재가 침현으로 백제 땅이었다는 것과 여기에 가르뱅이재 옆에 있는 옥천 옥각리 고분군이 백제의 7세기대 이후 횡구식석관묘로 판단된다는 발굴보고서는 이 지역이 백제 땅이었음을 실물로 증명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해 3월 31일 옥천 이성산성의 발굴성과와 학술적 가치 세미나에서 홍보식 교수의 옥천 이성산성 출토 신라토기의 구성과 특징 논문 중 신라 토기로 본 이성산성 운영에서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신라토기는 6세기 전반(2/4분기)과 7세기 전반(2/4분기)의 두 시기에 집중된다는 것과 옥천군 금구리 고분군은 전모가 조사되지 않아 전체양상 파악이 어렵다는 전제하에 ’발굴조사에 확인된 고분 및 출토품은 6세기 전반의 특징을 나타내는 신라토기이다. 6세기 후반의 특징을 나타내는 신라토기는 확인되지 않았고 나지구 8호 석곽묘와 지표채집품 중 7세기 전반 이후의 신라 토기들이 포함되어 있어 옥천 이성산성 출토 신라토기와 같은 양상을 보인다”에 대해 역사적 사실로 설명하면 삼국사기는 501년 백제 동성왕 23년 7월 탄현에 목책을 세워 신라에 대비하였다. 라고 되어 있어 탄현이 옥천군 오동리 숯고개이니 금구리는 신라땅이 되어 신라가 통제했을 것이다, 

관산성 전투 시 다시 백제가 관산성을 점령하였으니 관산성 전투 후에 금구리 고분에 신라 토기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침현 기록을 감안 시 이 지역이 660년까지 백제 땅이었으니 이성산성의 토기가 역시 금구리 고분군의 토기와 같은 양상이라면 이성산성(산계리토성)도 660년까지는 백제가 점령한 지역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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