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성 전투의 전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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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성 전투의 전개(5)
  • 이주우 옥천향토사 연구회 회원
  • 승인 2023.09.21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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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덕왕의 관산성 재점령 및 영동 공격-3

  관산성 전투 시 백제는 관산성을 지나 어디까지 진출하였나를 추정할 수 있게 하는 조순흠교수의 옥천지역 산성의 현황과 나제 국경선의 변천에서 7세기 중반 백제의 동진과 국경선의 변화에서 ’서산성과 이원리산성은 신라의 고시(리)산군 과 소이산현의 치소성으로 비정되는 산성이며 신라에 의해 축성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산성에서 백제 평기와가 다량으로 수습되는 양상은 백제가 이 지역에 진출한 후 산성을 재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003년 신라·백제의 격전지(관산성)지표조사에서 이원리산성에 백제 평기와 다량 수습의 내용은 관산성 전투 시 백제가 이원까지 진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영동에는 관산성 전투에 관한 전설이 있다.  영동군 심천면 각계2리 내력비를 보면, 내력비에는 ‘백제가 신라의 관산성을 침공했다가 대파당하고 퇴각하다가 이곳에서 또 격전을 하였는데

특히 핏골에서 전멸하였으므로 그 후로 이 골짜기를 핏골이라 했다는 전설 이라고 되어 있으나, 관산성전투가 신라가 옥천에서 이겼다면 영동에서까지 백제와 신라가 싸울 필요는 없었을 것 같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가 영동에서 싸움을 했다는 것은 신라가 옥천서 패하고 영동까지 밀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영동의 전설을 보면 전쟁의 주도권이 백제에 있어 신라는 경주에 군사적 지원과 왕의 격려가 필요했던 것 같고, 신라의 진흥왕은 신라군을 격려하면서, 부족한 군사는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한 것 같다. 

고구려의 참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양원왕 10년 554년 겨울, 백제의 웅천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위덕왕 원년,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웅천성을 침공하였다가 패하고 돌아갔다.

관산성 전투 시 백제가 금강으로 공격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의 웅천(공주)의 공격은 백제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공격이었기 때문에 백제는 반드시 방어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가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했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삼국사기 내용이 고구려의 공주(웅천)성 공격이 적극적이지 않아, 고구려가 자발적으로 공주(웅천)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내용 ’高句麗大擧兵來攻熊川城 敗衄而歸‘인데 해석하면, 고구려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웅천성을 공격하였으나 패하고 돌아갔다(敗衄而歸)에 衄 : 코피뉵자가 포함되어 코피 뉵자의 의미(코피가 나오다, 꺾이다, 오그라들다, 줄어들다)를 볼 때, 웅천을 공격하던 고구려군이 일정 규모의 백제군이 나타나자 바로 철수하니 백제 입장에서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기가죽어 도망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는 고구려가 신라의 요구를 받고 공주(웅천)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가 백제 땅을 점령하겠다는 의사보다는 영동을 공격하는 백제군을 공주쪽으로 분산하여 백제가 영동에 있는 신라군을 제압하지 못하게 할 목적이 있었고, 일정규모의 백제군을 공주로 분산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고구려는 목적을 달성하였기에 굳이 싸울 필요 없이 철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참전과 철수 후 백제는 고구려가 관산성 전투에 개입하면 백제의 신라 정벌이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다고 추정되어 영동을 기점으로 관산성 전투는 마무리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참전 배경으로 551년과 552년, 553년에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관계를 보면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12년 551년 3월 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고, 이를 기회로 열 곳의 군을 빼앗았다.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 진흥왕 12년 551년 신미에 왕이 거칠부와 구진 대각찬, 비태 각찬, 탐지 잡찬, 비서 잡찬, 노부 파진찬, 서력부 파진찬, 비차부 대아찬, 미진부 아찬 등 여덟 장군으로 하여금 백제와 협력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백제인들이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세를 몰아 죽령 이북 고현 이내의 10개 군을 빼앗았다. 일본서기 흠명천황 12년 551년 이 해 백제 聖明王이 몸소 군사 및 두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두 나라는 新羅‧任那를 말한다) 高麗를 정벌하여 漢城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 진군하여 平壤을 토벌하였는데,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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