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괄의 난 평정한 옥천출신 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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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 평정한 옥천출신 공신
  • 전순표 시인 옥천향토전시관
  • 승인 2023.10.12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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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을 통해 집권한 인조반정의 공신에 대한 처우에 일부 공신들이 불만을 품어 1624년(인조 2년)에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괄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다. ‘이괄의 난’을 평정할 때 공을 세운 옥천 사람은 남림과 조헌 선생 아들 조완도, 임진왜란 때 순국한 강융운 충신의 아들 강경람 장군까지 세 분이 있다.  

남수문 후손 남림 호종공신 올라

 남림(南林)의 본관은 고성 남씨(固城南氏)로 조선초기 문관으로 세종 때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옥천 학산 출신 남수문 선생의 후손이다. 그는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 때 임금의 탄 수레를 호위하는 공을 세워 호종공신 녹권에 오르고 이같은 공으로 경주부윤에 제수되었다.

조헌 아들 조완도, 토벌에 공세워

조완도(趙完堵)는 중봉 조헌 선생의 차남으로 형인 장남 조완기 충신이 금산전투에서 의병장 조헌 선생과 함께 순국하자, 조헌 선생의 가계를 이었다. 그는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며 1624년 ‘이괄의 난’ 때에 반란군을 토벌하고 공주까지 인조를 호종하여 벼슬은 금부도사, 강읍현감에 이르렀고 공신녹권에 실렸다. 조완도 선생은 8월 18일 금산싸움 당시 전승업과 곽현과 함께 의주 행제소에 청주성 탈환과 관련한 장계를 올리려고 홍성까지 갔다. 그러나 금산싸움에서 조헌 선생이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전승업 선생과 함께 금산으로 되돌아 왔다. 

용맹한 강경람 장군, 관군 선봉장 
 
강경람(康敬攬) 장군은 인조반정 때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1624년에 일으킨 이괄의 난 때 큰 공을 세운 장군이다. 그의 아버지 강융운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 대항하다가 순절했다. 아들 강경람은 아버지가 순절한 것을 평생 동안 한스럽게 생각하며 남쪽 하늘을 볼 때마다 말하기를 “왜놈이 나의 아버지를 살해하였으니, 반드시 그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고 다짐하고 말타기, 활쏘기, 칼쓰기를 열심히 익혔다.

그러다가 1624년에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기 위하여 반란군 적진에 뛰어 들어 많은 공을 세웠다. 당시 팔도도원수 장만 장군은 강용람 장수의 용감한 싸움 장면을 보고 장하게 여겨서 그를 선봉장군으로 앞세워 관군의 사기를 북돋아서 싸우게 했다. 이 때 이괄 반란군은 한양까지 남하하여 광주를 거쳐 이천을 달아나서 반란은 진압되었다. 이후 반란군을 피해 공주까지 피난을 갔던 인조는 한양으로 다시 돌아 올수 있었다. 이 ‘이괄의 난’에서 선봉장으로 공을 세워 이등공신의 녹권에 올랐고 벼슬은 부사과가 제수되었다. 

이괄잔당 후금을 부추겨, 호란 발생
 
이괄의 반란이 실패하자, 일부가 만주 땅 후으로 도망쳐 조선의 불안한 내정을 고자질하며 조선으로 남침을 종용했다. 이것이 1627년(인조 5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북뱡 국경을 지키는 조선의 정예병력 대부분이 ‘이괄의 반란’으로 인해서 죽거나, 만주로 도망을 가게 되어서 결국 후금의 조선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다.

반정 결정적 역할, 이괄 홀대 반란
 
1623년 광해군이 서인을 몰아내고 오랑캐 후금과 실리외교를 펼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서인의 핵심인 김류, 이귀, 이괄 등이 광해군을 몰아낼 반정을 꾀했다. 1623년 4월 11일에 서인의 주도로 일어난 인조반정에서 이괄은 이 때 군사를 이끌고 선두에서 창의문을 격파하고 궁궐로 돌진,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이괄이 인조반정에 가장 큰 공을 세웠으나, 고작 2등 공신에 책록,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 불만이 컸다. 그리고 이괄의 아들이 한명련, 정충신 등과 역모를 꾸몄다는 무고로 아들 이전이 한양으로 압송될 처지였다.

 이에 이괄은 한명련, 기억헌 등과 함께 압송하려온 사람들을 죽이고 1624년 3월 11일 북방 상비군 1만 2000명의 군사로 반란을 일으켜 ‘이괄 반란군’은 황해도 황주와 마탄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신속히 남하했다. ‘이괄의 군’이 개성을 지나 3월 26일 임진강을 건너자, 인조는 밤에 한양을 버리고 수원을 거쳐 천안으로 갔다. 12일 새벽 인조는 공주로 피난을 가야했다. 

반란군은 3월 29일에 한양에서 경기도 광주로 향하다가 장만의 관군에 추격을 받는다. 이괄은 4월 1일 도망가다, 이천(利川)서 부하 기익헌, 이수백에게 살해되었다. 반란군에 투항했던 이흥립은 자결하였고 한명련의 아들 한윤과 한택 형제는 후금에 투항, 강홍립 휘하로 들어가 이후 정묘호란의 명분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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