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의 문신이며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이나 수록되어 있고 중국에서 송자(宋子)라고 화자 되었던 대유학자이자 성리학자로 문묘에 배향된 대유학자이자, 노론의 영수였다. 그는 1607년(선조 40년)에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에서 사옹원 주부를 지낸 아버지 송갑조(宋甲祚)와 어머니 선산 곽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곽씨 부인 태몽에 밝은 달과 구슬을 삼키는 꿈을 꾸어 그를 잉태했다고 전해진다. 자는 영보(英甫)이고 아명은 성뢰(聖賚), 호는 우암(尤庵), 우재이며 별칭으로 화양동주로 불리며 본관은 은진 송씨(恩津宋氏)이다. 8세 때 회덕 친척 집인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아버지인 송이창 선생에게 함께 공부했다.
1625년(인조 3년)부터 사계 김장생(金長生) 선생과 그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金集) 선생에게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27세 때에는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 1633년(인조 10년) 경릉참봉으로 출사하여 1635년(인조 13년)에 봉립대군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그 후 진선, 장령, 찬선 이조판서, 우의정에 올랐고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던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강화도성이 함락하자, 대소 신료와 함께 삼전도에 나가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그래서 소현세자와 봉립대군은 삼학사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붙잡혀갔다.
이에 송시열 선생은 낙향하여 영동군 황간면 냉천리 월유봉 아래 한천서원에서 10년간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에만 몰두했다.
1658년(효종년) 7월에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며 9월 이조판서에 올랐고 다음해까지 북벌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첫딸을 시집보내며 도리를 다하라는 계녀서(季女書)를 써 보냈다.
그러나 1659년 9월 효종이 급사한 뒤, 조대비의 복상문제로 예송(禮訟) 논쟁이 일어나고 국구 김우명 일가와의 알력과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 때문에 그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다시 낙향하였다. 그는 1674년 효종비의 국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禮論)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그도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되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다시 서인 정권을 잡자 그는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정계에 복귀하였다.
그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경연사로 임명되며 또 봉조하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 김석주, 김익훈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직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려고 임신년 고변 사건에서 그는 김장생(金長生)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였다. 이 고변 사건으로 서인의 소장파에게 비난받았고 또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1683년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하게 되었다. 1689년(숙종 15년) 1월 숙빈 장씨(장희빈)가 아들을 낳자, 원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다.
이때 송시열도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 받고 죽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西人)이 정권을 잡자 그의 관직은 다시 회복되었고 다음해 문정(文正)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1715년 병신년 처분과 1756년(영조 3년) 증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774년(영조 20년)의 문묘배향으로 그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고 영조(英祖) 및 정조(正祖) 대에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는 더욱 존숭되었다고 전국 70개 서원 등에 위패가 배향되었다.
송시열 선생은 조선의 근본인 유학과 성리학의 정신적 지주로서 정조 때는 국가적 차원에서 국가의 스승인 송자(宋子)로 격상되고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송자대전」을 1787년(정조 11년)에 간행했다, 송시열 선생이 지은 ≪공경히 중봉 조헌 선생의 차운하여 김만균에게 보내다≫라는 제목의 오언율시를 감상해 보자.
새로 지은 집 맑은 물가에 임하니 /스승 가신 지 묻노라 몇 해던가
하늘 거리에 기성·미성이 멀고 /인간 세상에는 세성이 돌왔구료
사업은 주자의 글 속이/연원은 율곡에게 놀았노라
맑은 술잔 올리고자/마름 물가에 캐었노라
이 시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지당(二止堂)에서 옥천군수를 했던 김만균의 시에 차운하여 지은 시이다. 주자학의 높은 학문을 가진 중봉 조헌 선생을 그리워하며 율곡 이이 선생의 문인임을 나타내며 그에 대한 공경심을 표현했다. 끝 귀는 다른 책에는 “평생 사모 간절하니 오늘도 물가에 섰노라”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따뜻한 봄날 지은 ≪화인(化仁) 도중에서≫ 제목의 시가 있다. “들 빛 푸릇푸릇 보리 싹 점점 자라고 /청화한 계절 단오 가깝구나 발길 따라 신록이 고우니 /시냇가 풀 향기 사랑스럽구료”라는 칠언절구의 시로 우암 송시열 선생이 늦은 봄날의 보리밭 길을 가면서 느낀 정서를 담은 시이다. 옥천군 안내면 장계리에서 금강의 화인진 나루를 건너 인포리 금강 가 화인 들판 보리밭에서 서정적인 늦봄의 정취가 물씬 나는 詩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