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선생 손자 봉곡(鳳谷) 송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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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선생 손자 봉곡(鳳谷) 송주석
  • 전순표 옥천향토전시관장
  • 승인 2024.01.18 11: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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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주석, 권상하, 금봉의, 이경화 선생 등은 송시열 수제자
 
 정간공 송주석(宋疇錫)은 송시열 선생의 손자이지만, 수암 권상하(權尙夏), 옥천 옥각리 출신 금봉의 ,동이면 조령리 새재 출신인 이경화 선생 등과 함께 우암 선생의 학맥을 이은 문인이다. 

그는 1650년(효종 원년)에 태어나서 1692년(숙종 18년) 43세 비교적 이른 나이에 생을 마쳤다. 

 그의 자는 서구(敍九)이고 호는 봉곡(鳳谷)이며 본관은 은진 송씨(恩津宋氏)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우암 송시열 선생인데, 자손이 없어 대군 사부를 지낸 송시형(宋時瑩, 1592~1638년)의 둘째 아들 송기태(宋基泰)를 우암에게 양자를 보내 후사를 이었다. 송기태는 바로 봉곡 송주석의 아버지로 동지사(同知事)를 지내서 보통 동지공이라 부른다.

 동지공 송기태는 5남 1녀를 두었는데 봉곡 송주석은 그중 차남이다. 봉곡의 어머니는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중종의 6세손이며 동지돈녕부사를 지낸 이정한의 딸로 4덕을 갖추었고 1650년(효종 원년)에 서울 사직동에서 송주석을 낳았다. 송주석은 어릴 때부터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했다. 

소년기에 할아버지 송시열 선생에게 글을 배웠는데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우암 선생은 그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어머니 완산 이씨가 돌아가신 후에 항상 송시열 선생 곁에서 학문에 전력하였다. 14세에 우암 선생이 입으로 구술하는 서찰과 각 집안의 문장을 거침없이 대필해서 송시열 선생은 늘 손자를 칭찬하며 흡족해 하였다 한다.

 1675년(숙종 원년) 예송 논쟁으로 우암이 함경도 덕원으로 귀양 갔을 때 손자 송주석은 귀양지에 따라가서 학문을 강론했고 우암은 유배지를 장기-거제로 옮겨 위리안치당했다. 경신대출척으로 귀양 풀려 봉곡은 우암 선생을 모시고 돌아왔다.

 1683년(숙종 9년) 증광 문과에 합격하여 처음 관직에 나가 예문관 검열, 대교, 홍문관 정자, 수찬, 지평, 홍문관 부교리 등을 역임하고 조부 송시열을 봉양키 위해 1688년 용담현감을 끝으로 관직을 마쳤다. 1689년 장희빈 세자 건으로 제주도로 위리안치 되었을 때 할아버지 송시열 선생을 모시고 갔다. 6월 정읍(井邑)에서 우암 선생이 사약을 받기 전에 그에게 모든 유품과 후사를 부탁하였고 장례 후에 자제를 가르치고 우암 유고를 모아 연보의 초안을 만들었다. 다음에 우암 선생의 가장(家狀)을 짓다가 1692년(숙종 18년) 10월에 병환으로 43세에 생을 마쳤다.
 사후 송주석은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봉곡 송주석 선생의 부인은 완산이씨(完山李氏)이며 문정공 이경여(李敬輿)의 손녀 딸로 1696년(숙종 22년) 44세를 살았다. 그와 그의 부인 묘는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쌍청당에 합묘되었다. 봉곡집은 7권 4책으로 1905년 목활자로 간행되었다. 또 유배가사로 북관곡(北關曲) 115행이 유명하다.

 가사문학인 송주석 선생의 <북관곡>은 필사본으로 <은보집략恩譜輯略>에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은 1675년(숙종 1년)에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된 우암 송시열(宋時烈)을 함께 모시고 따라갔던, 그의 손자 송주석이 지은 유배가사이다. 

조선 후기 서인과 남인의 예론으로 인해서 치열한 정치 투쟁이 있었는데, 송시열이 유배되기 이전에 남인인 허목과 윤선도 등이 효종의 상례에 조대비의 복제를 삼년설로 주장했다가 유배되었다.

 얼마 후 효종비인 인선왕후의 상을 당하여 서인인 송시열이 조대비의 복을 대공설(9개월)로 주장하다가 남인인 허목 등에게 패배하여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되었다. 송시열의 입장에서 귀양을 가게 된 전후의 사정과 유배된 귀양지까지의 여정 등을 읊은 작품이다. <북관곡>은 필사본<은보집략>에 송찬규(宋燦圭)의 가사 <상산별곡>과 함께 실려서 있으며 <북관곡> (단권)이 필사본으로 전하고 있다. 

 가사문학 북관곡(北關曲)의 앞 부분을 소개하면 ~<중략>~ 어와 서러워라 이 행차 무슨 일인가 /장사 하늘 끝에 가의(賈誼)의 행색인가 /조주 팔천 리에 한유(韓愈)의 길이던가/ 북쪽 변방 천리 밖에 어디라고 가시는가 /평생을 돌아보나 지은 죄 없건마는 /뒤늦게 어떤 일로 이런 화 만나셨나 /무신년과 기유년 사이의 일을 생각하니 목이 멘다 /슬프다 효종대왕 큰 뜻을 품으시고 /감반의 옛 학문에 동덕을 찾았으니 /그 때의 한 신하가 초야로 일어나서 오니 /바람과 구름이 꼭 들어맞기가 천지에 드물거든 /촉나라 제갈량이 그처럼 하였던가/다시 회복하는 대사업을 어지간하면 이룰러니 /신하와 백성들이 녹봉이 없어 덧없이 여의었으니 /외로운 신하의 피눈물이 머리맡에 젖었구나 /님 향한 충성심이 죽기를 생각했지만, 상례의 제도 중한 일을 구차하게 할 것인가 /기년복 중자설이 옛 법대로 하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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