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김순 고려말 이조판서
사육신 백촌 김문기 선생의 할아버지 김순(金順)은 고려 말인 1341년(충선왕 2년)에 태어나서 조선 초기인 태종 4년인 1404년에 생을 마친 고려의 문신이다.
그의 자는 창여이고 호는 퇴휴당(退休堂)이며 본관은 김녕 김씨이다. 김녕군(金寧君) 김시흥(金時興)의 6세손으로 판도판서 김광저(金光儲)의 장남이다. 고려 공민왕 때 문학적 재능과 정책에 관한 논술로 인재를 뽑는 문과 과거시험인 제술과에 급제하여 전농시 정3품인 판전농사사와 호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다. 조선조에 들어서서 태종 때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불사이군, 두암리 마엄정 짓고
김순(金順) 판서는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물러났다는 뜻에서 호는 퇴휴당이라 하였다. 그는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 서당골에 이사하고 옥천 이원면 구장터 현리 부근 두암리에 마암계당이라 부르는 마암정(馬嚴亭)을 건립하고 독서와 음풍농월을 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묘소 월이산 남쪽기슭, 심천마곡 서재분지
김순 판서의 묘소는 옥천의 명산 월이산 남쪽 기슭으로 둘러싸인 영동 심천 옥계리 폭포 위편 서재 분지가 있는 영동군 심천면 마곡리 서재 분지 산기슭에 위치한다. 옛날에는 이 서재 마을에 김순 판서에게 제사를 올리는 경원재(景遠齋)가 있었다. 지금은 마을 회관 부근에 ‘경원재’ 비석과 터가 남아 있다.
아버지 김관, 조선 초기 이조판서
백촌 김문기 선생의 아버지 김관(金觀) 판서는 고려 말인 1364년(공민왕 13년)에 태어나서 1437년(세종 19년)까지 살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그는 본명과 달리 한자로 일명 김관(金寬)으로 불리기도 했고 호는 수헌(睡軒)이며 고려말 이조판서을 지낸 퇴휴당(退休堂) 김순(金順)의 장남이다.
김관 판서는 조선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 전기 중앙군 오위 중에서 우위에 배치된 호분위 정5품 문관인 좌령 사직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이조판서에 까지 올랐다. 관직에 있는 동안 그는 1420년(세종 2년)에 지방 아전인 향리(鄕吏)들이 군대에 복역하는 군역을 면제해 주는 법을 만들었다.
기근 백성구제, 많은 공적 남겨
그리고 1422년(세종 4년)에 기근이 일어나자, 전국 8도에 진제소(賑濟所)를 설치하여 굶는 백성을 구제하였다. 또 1429년(세종 11년)에는 단오절에 돌을 던지며 싸움 놀이하던 풍습을 금하게 하였다. 특히 1430년(세종 12년)에 농토에 물을 되는데 물레방아를 사용하도록 장려하는 등 국가 시책 발굴과 시행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세종 때 영의정에 증직되었고 전북 익산 오강서원(五綱書院)에 배향되었다.
묘소 영동 명천리, 묘비 이병모 지음
김관 판서의 묘소는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명천리 금강 기슭에 있다. 이 김관 판서의 묘소를 이 지방 사람들은 ‘대감 산소’라 하며 그 골짜기를 양산밭골(日傘田谷)이라 부른다. 그 이유는 김관 판서의 장남이신 사육신 김문기 선생께서 아버지 산소에 성묘 다닐 때 언제나 산소 아래 밭에다 양산을 꽂아놓고 올라 다녔기 때문이다.
김관 판서의 묘비는 영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짓고 영동 심천면 명천리 스무내 마을에 있는 그의 재실인 경모재(景慕齋) 기문(記文)은 조선후기 성리학자인 문충공 연재 송병선(宋秉璿) 선생이 지었다.
김문기 선생 숙부, 김지 대사성
김지(金智) 대사성은 1366년(공민왕 15년) 태어났고 호는 농은(農隱)이며 이조판서 김순의 차남이다. 사육신 김문기 선생의 숙부이다. 조선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군영의 실무를 맡은 진무부위(副尉)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군량을 다루는 정3품 군자감정(軍資監正)을 거쳐 성균관장인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말년에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낙향하여 산수와 풍월을 벗 삼고 후학을 모아 강론하며 생을 마쳤다. 묘소는 영동군 심천면 구탄리 절골에 있고 재실은 영소재(永昭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