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 사 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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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사 랑
  • 이흥주 수필가
  • 승인 2024.02.22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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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가장 가까이서 살아온 개는 영특하고 귀여우며 주인에게 충성을 다한다. 그래서인지 개에 대한 전설도 많다. 주인의 생명을 구했다는 등 개에 대한 쉽게 믿기 어려울 정도의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눈으로 직접 확인이 안 된 이야기지만 믿고 싶은 게 우리의 심정이다. 주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주인을 구할 수도 있다는 믿음 같은걸 주는 게 개라는 동물이다.


한 방안에서 살며 저에게 먹이를 주고 온갖 정성을 다하니 동물 중에도 영특한 개가 특별히 사람을 잘 따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사실 개가 사람을 따르고 좋아하는 걸 보면 사람도 개를 귀여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개를 키울 때 오토바이를 몇 년간 탔었다. 퇴근 때 내 오토바이 소리가 저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면 이 녀석이 꼬리를 치며 왔다갔다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고 식구들이 말한다. 어디서 읽은 얘긴데 아파트에 사는 개도 주인 차 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면 반응을 한다고 했다. 


이 녀석이 퇴근길에 집에 들어서면 반가워 어찌할 바를 모르며 사정없이 달려들어 흙발로 옷을 완전히 뭉개놓는다. 내일 또 입고 나가야 하는데… 떼어내면 떼어낼수록 더 달려든다. 옷이야 어찌 되거나 말거나 나도 끌어안는다. 이젠 얼굴을 핥아 엉망을 만들어 놓는다. 인정머리가 없거나 덜된 사람을 보고 개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욕을 한다. 


한데 요즘 이 개가 사람에게 얼마만큼이나 충성을 하고 주인을 어느 정도나 보호하려는 심성을 가졌는지 실험을 한 영상이 SNS에 나돈다. 그 실험들을 보면 실망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기대했던 모습이 전혀 아니다. 주인이 어려움에 처한 척하며 동태를 살피는 실험을 하는 걸 보면 종을 떠나 모든 개들이 주인을 돕는 게 아니라 못 본 척하거나 도망을 가거나 그런다. 모든 개가 그런 모습을 보인다. 이거 말고도 다른 실험들을 보아도 사람을 완전 실망시키는 모습들뿐이다. 실험을 한 측의 결론도 개에게 너무 큰 기대를 갖지 말라는 이야기다. 개가 주인이 어려움에 처하면 돕거나 지켜줄 거라는 심리는 막연한 기대감일 뿐이다. 


개도 다른 동물보다 지능이 뛰어난 하나의 동물일 뿐이다. 이로 보면 주인을 구했느니 하는 말들은 사람이 만들어 낸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개에 대해 지나친 기대와 영물(靈物)시 하는 마음이 착각과 상상을 초월해 전설은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요즘 사람이 개에게 하는 걸 보면 개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사람이 저희들을 위해서 목숨 걸고 사랑하고 충성하는 줄 착각할 것이다. 실제 요즘 하는 것들을 보면 개가 이런 생각을 할 거라는 상상이 틀린 것도 아니다. 충견(忠犬)이란 말도 있는데 지금은 반대로 사람이 개에게 온갖 정성(충성)을 다하는 시대다. 주객(主客)이 완전 바뀌었다.


 거리에 보면 아기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안 보이고 늙은이나 젊은이나 개를 끌어안고 다닌다. 개는 그냥 무덤덤한데 반대로 사람이 더 요란을 떤다. 사람의 개에 대한 충성도는 앞으로 도를 더해갈 것이고 아기는 점점 더 보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아무리 이렇게 개를 위하여 요란을 떨어도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믿어지지 않지만 키우다 버리는 ‘인간’들도 있다니…… 개가 정말 이를 안다면 속으론 “에이 위선에 찬 인간들아!” 할 것이다. 개도 주인을 위해 목숨을 걸지 않지만 무슨 배신을 할지 모르는 게 인간들이니 개들이 그것을 모르는 게 다행이다. 


사실 개가 귀여운 동물임에는 틀림없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지나친 인간의 짝사랑일 뿐이다. 진짜로 개를 알면 ‘반려견’ 보다는 전에 부르던 애완견이 더 적절한 말일 것이다. 요즘엔 귀찮고 하기 싫은 일은 안 하는 세상이다. 아기도 키우려면 돈 많이 들고 힘들다고 생각하니 낳지 않는데 개는 귀찮긴 해도 사람을 잘 따르고 말도 잘 듣는다. 반항이 없고 순종만 하니 이런 개에게 자기의 나약한 심성을 기대고 싶은 건 아닌가. 기르다 싫으면 그만두면 된다. 


지금은 개도 때리면 법에 걸리고 먹어도 걸린다. 옛날엔 개 때리는 것쯤은 예사였다. 사람이 배가 고프니 개가 배가 고픈 건 당연했다. 하루 종일 굶거나 멀건 물에 등겨 조금 풀어주면 그게 전부였다. 그러니 종일 동네를 돌아다나며 먹을 걸 찾았다. 허술하게 두면 여지없이 개에게 뺏기고 그 개에겐 매타작이 돌아왔다. 어디서 개가 죽는 소리를 하면 또 두들겨 맞는 게 틀림없다. 실컷 맞곤 절뚝거리며 동네를 돌아다닌다. 그땐 아기 똥을 개가 먹었다. ‘똥개’라는 말은 여기서 기인한다. 개나 사람에게나 슬픈 세월이었다. 이렇게 힘들게 살던 개는 죽어서 보신탕 밖에는 안 되었다.
사람이 잘 사는 세상은 동물도 잘 사는 세상이 되고 그 영향은 산천초목에까지 이른다. 옛날엔 나무가 다 땔감으로 베어지고 가랑잎까지 닥닥 긁어다 땠다. 산은 정말 벌건 속살이 드러나 비만 조금 오면 하천은 완전 흙탕물이었다. 지금은 전기와 가스가 이를 대체하는 세상이다. 내가 나무지게를 벗은 지 수십 년도 넘은 지금 온 나라가 숲으로 덮였다. 산이 숲으로 덮이니 새나 산짐승들이 넘쳐난다. 개뿐이 아니고 모든 동식물이 호강을 하는 세상이다. 
지금 사는 곳이 읍 지역 큰 동네인데도 새들이 옛 시골동네보다도 더 흔해졌다. 종류도 다 헤아릴 수 없는 새들이 마당에까지 날아든다. 밭에가 일을 하면 기기묘묘한 새들의 울음소리는 듣기 좋다 못해 황홀하기까지 하다. 매미소리도 여름날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정서가 메마른 도시인이 매미소리도 소음이라 한다지만 내 귀엔 즐거운 음악소리다. 


이젠 개에게 쏟는 정성을 사람으로 돌렸으면 한다.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고 해보라. 사는 맛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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