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시인의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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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인의 기행
  • 김묘순 충북도립대 겸임교수
  • 승인 2024.03.21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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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서)
목이 마르지 않으려 물가에 자리한 수련. 그러나 물에 젖지 않으려는 몸놀림. 수련은 꽃수술의 무게를 이기기 위해 끝없이 바람에 흔들린다. 그래도 살아내기 위해 물가를 떠나지 못하고 작은 바람에도 멀미를 해대는 수련. 그 수련은 1970년대 20대의 팔등신 미인 수련과 닮은 이미지라는 생각은 나의 허튼 혜염일까.

물에 젖지 않고 바람에 눕지 않아야하는 백가지 이유는 알아도 누울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를 몰라 흔들리며 물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수련은 이 밤 내내 잠을 자지 않고 내 주변을 서성인다.

정지용은 세르팡에서 무엇을 생각하였던 것일까?

17. 어느 포로의 손목시계 
「진주(晋州) 4」를 읽으며 만난 아버지 

만고의 의인 논개를 기리기 위해 매년 5월 30일 논개사당에서 제를 지낸다. 한 번도 궐제한 적 없이 노기가 주제관이 되어 식을 거행한다고 하였다. 정지용은 촉석누각 위에 삼현육각이 잡히고 민속 가무가 진행된다고 하였다. 삼현육각을 맡은 남자 악공들이 기악 반주를 할 때 장막으로 가리고 안에서 숨어서 악음을 내보낸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 국악 국무는 실상 광대와 기생이 비절한 역사적 환경에서 이어온 것인데 장막 뒤에 숨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서술한다. 

진주 이야기만 나오면 아버지의 뒷모습이 그려진다. 아흔 중반의 아버지는 누워계셨다. 자꾸만 흐려지는 이승을 붙잡고자 눈꺼풀을 들썩였다. 고명딸이 찾아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손을 잡았지만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침묵은 고요로움을 안고 휘돌았다. 천성적으로 고요함에 적응을 못하는 나는 아버지께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아버지는 기운이 없으신가보다. 그래도 딸의 보챔에는 당해낼 재간도 딱히 없으셨다. 아버지는 늘 그러셨다. 나에게 당해낼 묘안을 잘 찾지 못하시고 내가 원하는 것을 거의 다 들어주고 말았던 것이다. 나도 또한 매양 한가지로 원하는 것이 생각나면 그 자리에서 얻는 것에 대한 확답을 들어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러니 아버지는 얘기를 늘어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일본에 징집 갔던 이야기를 도란도란 쏟아놓으셨다. 어머니와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본에 징집되어 갔단다. 

양말, 내의 등을 만드는 공장이었단다. 노동자들의 고뇌는 깊었다. 일제강점기에 그들의 치하에서 겪었던 속쓰라린 이야기들을 아버지는 늘어 놓았다. 게으름을 피운다는 이유로 그들의 몽둥이에 쓰러진 동료, 그를 보고 피가 끓어오르던 한국인 노동자들이 집단 항의를 하다 밥을 굶어야 했던 이야기를 하며 가만가만 옛날을 되짚어 보듯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밀감 나무가 느티나무만 했다는 이야기와 그 나무를 흔들어 밀감을 따서 주린 배를 채웠다는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리고 친구와 같은 고향에서 징집을 같이 당해 갔는데 어느 날 시체로 나뒹굴 때의 참담한 심정도 주먹에 힘을 불끈 들이며 말하였다. 여전히 한숨을 내쉬며 아버지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해방이 되면 고향에 가서 잘 살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급여를 꼬박꼬박 모았단다. 이렇게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날들이 지속되었다. 

아버지가 일하는 양말 공장 옆에는 미군 포로수용소가 있었단다. 그런데 미군포로에 대한 대접은 한국 징집 노무자보다 형편없었단다. 아버지는 일본인의 눈을 피해 미군포로를 도왔다. 밥을 몰래 남겨 그에게 가져다주고 먹을 것이 좀 생기면 날라다 주었단다. 그러면서 아버지와 미군포로는 친하게 되었단다. 미군포로는 아버지께 해방이 되면 미국으로 가자고 했다. 해방이 된 한국은 여전히 살기 힘들 것이라고 예상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는 “No"라 답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고향에 가야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 고통을 다 감수하였는데 가족을 버리고 홀로 잘 살겠다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가족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고통이 현실의 안위가 주는 고통보다 더 크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으리라.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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