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솔솔 풍기는 ‘서광 방앗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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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솔솔 풍기는 ‘서광 방앗간’
  • 이성재기자
  • 승인 2016.11.03 17: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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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종합상가 맞은편에 34년간 한자리서 명맥 유지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맛있는 떡을 만들기 위해 노력
신기방앗간 김광성씨와 떡류식품가공협회 처음 조직

요즘은 명절에도 떡을 집에서 만들어 먹기보다는 떡집이나 방앗간에서 사서 먹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명절이면 떡을 만들어 차례상에 올리고 이웃끼리 나눠먹던 떡 문화도 큰 변화를 일으켰다. 원조물자로 들어온 분유와 밀가루의 배급과 1960년대 이후 분식 장려정책으로 라면, 빵 등 밀가루 가공식품이 쏟아지면서 전통적 우리 식생활 문화가 변화됐다.

이제 떡이 차지했던 자리는 햄버거, 피자 등 서구식 식품에 내주고 말았다. 이제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떡 문화에 대해 주의 깊게 생각해보아야 하며, 우리 전통문화의 맥에 대해서도 의미를 부여해봐야 할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인절미, 시루떡, 백설기, 절편, 경단, 전병 등 다양한 종류의 떡을 만들어 먹어왔다. 명절은 물론 생일, 혼인, 환갑 등 집안의 큰 잔치가 있을 때에는 더더욱 빠지지 않는 음식이 바로 떡이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나라에서는 떡을 만드는 방법도 다양하게 발달했다. 멥쌀과 찹쌀을 주재료로 콩, 팥, 대추, 밤 등을 고물과 고명으로 사용해 다양한 종류의 떡을 만들었다.

떡은 만드는 방법에 따라 찌는 떡, 치는 떡, 지지는 떡, 삶는 떡 등 4가지로 구분된다. 찌는 떡은 우리나라의 떡 중에서 가장 많은 종류를 차지하며 곡물 가루를 시루에 안치고 솥에 얹어 증기로 쪄내는 방식이다. 대표적인 찌는 떡은 시루떡, 백설기, 송편, 증편 등이 있다. 치는 떡은 도정한 멥쌀이나 찹쌀의 알갱이 또는 그 가루를 시루에 쪄낸 후 열기가 있을 때 절구에 떡메로 쳐서 만든다. 치는 떡에는 인절미, 가래떡, 절편 등이 있다. 지지는 떡은 찹쌀가루를 끊는 물로 익반죽하여 모양을 만들어 기름에 지진 것으로 부꾸미와 전병 등이 있다. 삶는 떡은 찹쌀가루나 수수가루를 끊는 물로 익반죽하여 동그랗게 빗어서 끊는 물에 삶아 고물을 묻혀 만든다. 경단 등이 삶는 떡의 대표적인 떡이라 할 수 있다.

■ 셋째 동생인 김은구(58) 씨에게 떡 만드는 기술 배워.

옥천읍 금구리 옥천종합상가 맞은편에 위치한 서광방앗간은 34년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광방앗간 김영구(64) 씨는 “떡의 재료와 만드는 방법이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 1982년 방앗간을 시작한 이래 똑같은 맛을 지켜온 셈이다. 이는 서광방앗간만의 특색을 만들어가자는 김 씨의 장사철학이기도 하다.

안내면 답양리가 고향인 그는 대전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매형이 개인 사정으로 그만두게 된 방앗간을 인수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됐다. 떡 만드는 기술을 전혀 몰랐던 그는 인수하기 전부터 매형의 방앗간에서 일을 하고 있던 셋째 동생인 김은구(58) 씨만 믿고 방앗간을 시작했다.

김 씨는 6년간 동생에게 떡 만드는 기술을 습득하고 마침 다른 사업으로 동생이 고향을 떠나게 되면서 아내와 현재까지 방앗간을 운영해오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서광방앗간은 옥천의 대표 떡집 중 하나로 1980년대에는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손님이 많았지만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면서 식생활의 변화와 현대화한 전문 기계식 떡집이 늘면서 점점 영업이 하향세로 돌아섰다.

개업 초기에는 수동식 기계로 대부분의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품은 많이 들고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아 밤늦도록 일을 했다. 당시 처가가 옥천읍에 있어 처가 식구들의 도움으로 명절에는 새벽 2시부터 저녁 9~10시까지 떡만 해대는데도 제대로 주문량을 맞추지 못할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지만 지금은 찾는 손님들이 대부분이 연로한 노년층으로 음식의 소비도 줄어들어 방앗간도 지역만을 바라보고 운영하기에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한다.
김 씨는 “손님들의 요구에 따라 떡이 나오는 시간을 맞추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서 떡을 만드는 일이 많았다”며 “주말에는 밤을 새는 일도 흔했지만 손님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어 힘든 줄 모르고 떡을 만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서광떡방앗간 전경.

■ 부인 천상순(61) 씨와 함께 새벽 5시 어김없이 가게 문 열어.

물에 충분히 불린 통통한 흰 쌀을 체에 밭쳐 물기를 쪽 빼고 방아에 쏟은 후 노련하게 소금을 뿌리면 대충 간은 맞춰진다. 떡은 뭐니 뭐니 해도 간이 잘 맞아야 하지만 오랜 시간동안 떡방아 일을 해 온 김 씨는 눈대중으로도 뚝딱이다.

쌀과 재료를 씻어서 불리고, 콩가루 등을 미리 볶는 등의 사전 작업은 보통 전날에 해 놓고, 당일에는 새벽 5시부터 본격적으로 떡을 만들어 낸다. 송편이나 돌떡 등 특별 주문이 있을 때는 새벽 2~3시에도 일을 시작한다. 주문 양에 따라 밤을 새우기도 한다. 아침에 바로 떡을 가져가 먹을 수 있게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부지런하게 맛있는 떡 만들기를 위해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김 씨는 떡을 만들고 고춧가루를 빻고 참기름을 짜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다. 친절한 미소가 트레이드마크인 그는 부인 천상순(61) 씨와 함께 새벽 5시면 어김없이 가게 문을 연다.
몸은 고단하지만 도시에 있는 자식들을 위해 손수 농사지어 고춧가루를 빻고 참기름을 짜러 오는 손님들에게 자신의 물건처럼 소중히 다뤄왔다. 소신껏 이제까지 달려온 방앗간 일을 그는 큰 자부심과 노하우를 갖고 운영해 왔다.

김 씨는 “떡이고 고춧가루고 기름이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최선을 다해 내 일처럼 신경 썼다”며 “30년 넘은 단골들은 대부분이 초창기에 맺은 인연으로 방앗간 주인과 손님으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쌀을 빻는 로라.

■ 30년 넘은 단골 있어 방앗간 오래 지켜나갈 계획.

서광방앗간은 들기름, 참기름, 볶은 깨, 볶은 콩, 미숫가루, 고춧가루, 각종 떡 등을 재료와 함께 주문을 받거나 재료를 손님이 가져와서 가공 상태만을 주문하는 방식으로 영업하고 있다. 찾아오는 손님들 대부분이 단골들이고 멀리 이사 간 경우에도 전화로 주문해 택배로 물건을 배송하기도 한다. 참기름이나 들깨가루, 들기름 등은 무엇보다 원료에 대한 확인이 어려워 신용이 중요한 부분으로 타지에서도 김 씨를 믿고 주문한다. 지역 주민들은 자신이 소비하는 것보다 자녀들에게 보내주기 위해 그의 방앗간에서 직접 기름을 짜고 떡을 하고 깨를 볶는다.

손님 층이 젊은 사람보다 대부분 오랫동안 방앗간을 이용해 온 장년세대이다 보니 그의 방앗간은 동네 사랑방 구실도 하고 소식통 역할도 톡톡히 한다. 주민들이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이야기와 음식을 나누는 공간으로 예년에 비해서는 덜하지만 활기도 여전하다.

김 씨는 “매일 놀러오는 주민들과 30년이 넘는 단골손님들이 있어 문을 닫을 수가 없다”며 “조금이라도 움직일 힘이 있을 때까지는 서광방앗간을 오래도록 지켜나가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서광떡방앗간에서 판매하는 다양한 떡.

■ 가격경쟁 심해 표준 요금표를 만들어 보급.

개업 초기 옥천읍에 4~5곳의 불과하던 방앗간이 시간이 지날수록 크게 늘면서 옥천읍은 10~15곳의 방앗간이 있었다. 옥천군 전체로도 방앗간이 50여곳으로 늘면서 서로 가격경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됐다. 이에 김 씨는 신기방앗간 김광성 씨와 떡류식품가공협회 옥천군지회 처음으로 조직하고 김광성 씨가 회장, 김영구 씨는 상무로 활동하면서 맞춤떡 표준 요금표를 만들어 보급하는데 힘썼다. 옥천군 전체 50여곳의 방앗간 주인들을 직접 만나서 가격 안정화를 위해 설득하고 분쟁도 해결하는 등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하기도 했다.

김 씨는 “당시 방앗간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서로 가격 경쟁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정작 떡에 들어가는 재료가 부실해지지 않을까 걱정했다”며 “다행히 저와 신기방앗간 김광성 씨가 주축으로 떡류식품가공협회 옥천군지회를 만들어 회원을 늘리고 표준 요금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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