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꿈꾸었을 세상이 이 땅에 꼭 이뤄지기를”
상태바
“언젠가 꿈꾸었을 세상이 이 땅에 꼭 이뤄지기를”
  • 고은광순
  • 승인 2017.02.02 11: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은광순의 ‘해월의 딸, 용담할매(청산편)’

일본은 1880년대 후반 이미 세계적 수준의 무라타총, 20만분의 1 조선 전도를 완성하고 해저케이블을 부산에 끌어올려 전쟁준비를 완료했다. 조선반도를 통해 대륙을 집어삼킬 속셈이었다. 방해가 되는 건 동학도들. 일본왕의 지휘 아래 꾸려진 히로시마 대본영은 ‘민나 고로시(모두다 살육하라!)’라는 명령을 내렸다. 갑오년(1894)에는 전국에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아니 일본군은 조금의 피해도 입지 않은 채 무기가 변변찮은 동학군들만 끈질기게 저항하다가 두 달 사이에 3만~5만 명이 스러져갔다. 조선의 진압군과 양반들은 일본의 뛰어난 전력에 감탄하며 친일파가 되었다. 남녁의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뛰어난 인물들이 모두 처형되었다.

해월과 손병희가 이끄는 동학군은 임실까지 후퇴했다가 북으로 기수를 돌려 12월 9일 무주의 설천에서 고개를 넘어 영동 용화의 달밭고개, 가곡, 용산에서 전투를 벌이고 청산을 거쳐 보은으로 향했다. 그들의 머리는 수피(현 탄부면 대양리)에 있었고 꼬리는 원암(현 삼송면 원남리)에 있어 그 길이가 30리에 이르렀다. 그러나 12월 17일, 18일 이틀간 보은 북실(종곡)에서 일본군이 섞인 관군에게 2600명이 살해되고 말았다. 천신만고 끝에 해월을 비롯해 극소수의 살아남은 동학군들은 더 멀리 더 깊숙이 숨어들어갔다.

전쟁을 치르러 남자들이 떠난 이후 젊은 어머니 손 씨와 손 씨가 낳은 다섯 살짜리 동희와 윤이 등은 청산현의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새로 부임해 온 현감 박정빈은 동학의 지도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여자들에게 모진 고문을 했다. 박정빈은 해월의 아내 손씨를 고문하다가 혼절하자 윤을 옥에서 내왔다. 이번에는 긴 형틀을 준비했다. 옥졸들은 윤의 두 팔을 뒤로 꺾어 손목을 꽁꽁 묶은 뒤 형틀에 눕히고 다리를 꽁꽁 묶었다. 포졸 하나가 가슴 위로 올라 타 어깨를 내리 찍었다. 머리맡에 서 있던 포졸이 윤의 얼굴에 보자기를 덮더니 코를 막고 입에 물을 계속 쏟아부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을 쉴 수 없다는 게 이렇게 큰 고통일 줄이야. 윤은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고 고개를 돌려보려 했으나 우악스러운 남정네들의 힘을 당할 수 없었다.

“네 애비가 갈만한 곳을 대라.”

“푸하...푸...푸... 모른다. 설령 내가 안다고 해도 말해 줄 성싶으냐?”

고문을 받는 동안 윤은 아버지의 무사함에 감사했다. 고문을 받아 죽음으로 끝이 난다면 이 고통의 순간도 끝이 날 것이다. 죽지 않는다 해도 이 고통의 시간이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순간이 결국은 지나가리라. 윤은 정신이 차려지는 순간순간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주문을 외우며 이를 악물었다.

현감은 결국 해월 일행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그는 옥졸 정주현에게 열여덟이 된 윤을 데리고 살며 그녀 주변을 살피게 했다.

달포 후 정주현이 방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씩씩거리며 들어섰다. 눈두덩이가 찢어지고 얼굴에 멍이 들고 옷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어젯밤 사이에 동비들이 옥문을 부수고 네 어미 년과 아이를 빼돌렸단다. 몸을 추스르면 사또가 주리를 틀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얼마나 약이 오르셨는지 우리를 이 지경으로 물고를 내셨으니, 이 모두가 네년들 탓이 아니고 무엇이냐?”

정주현은 난폭하게 윤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 대었다.

10월 초, 아버지의 제자 김낙봉이 빨래하러 집을 나서는 윤의 함지박에 종이쪽지를 끼워 넣고 사라졌다. ‘10월 보름밤 팔음산’ 아버지 글씨였다. 보름날 밤에 몰래 집을 빠져나간 윤은 팔음산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함께 가겠느냐고 물었지만 윤은 고개를 저었다. 해월은 보따리에서 경전을 꺼내어 윤에게 쥐여 주었다.

“윤아, 너는 잘 이겨 낼 것이다. 너는 강한 아이야.”

윤은 아버지가 몰래 전해주고 간 경전을 내놓고 읽을 생각으로 꾀를 내었다. 예전에 살던 문바위에 물건을 찾으러 간다며 정주현의 동생이자 감시자인 아현과 길을 나섰다. 아현이 물었다.

“그런데 언니, 작년엔 청산에 일본군들이 많이 들어왔잖아요. 문바위, 석정, 배암티 할 것 없이 사납게 불을 지르고 죽이고…. 문바위 뒤 천관산 샘티재, 밤재, 장군재 할 것 없이 사방에서 동학군 수백 수천 명이 죽었답디다. 왜 일본 놈들이 남의 나라에 들어와 그랬대요?”

“백성들이 사방에서 들고 일어나니 한양에서 놀란 양반들이 청에 도와달라고 했대요. 일본 놈들이 그걸 구실 삼아 쫓아 들어온 거고.”

“일본은 나쁜 놈들이네?”

“동학하는 이들은 나랏님, 양반들과 손잡고 일본을 치자고 했는데 나랏님은 거꾸로 일본과 손잡고 동학하는 백성을 쳤다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