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충렬제, 지역행사로 위축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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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충렬제, 지역행사로 위축 우려
  • 도복희기자
  • 승인 2018.01.25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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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중봉문화제 내년부터 대폭 확대 따라

중봉 조헌선생의 탄생지인 김포에서는 ‘중봉문화제’가 8회째다. 현재 시비 4000만원 예산으로 시행되고 있는 ‘중봉문화제’를 내년에는 의병재현 등 다양한 행사로 대폭 확대해 치룰 계획이라고 한다. 김포시문화원 이종한 사무국장은 “시비 8000만원 예산 확보가 쉽진 않다. 그러나 시비가 책정되면  중봉문화제를 더 확대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포시에서 ‘중봉문화제’를 전국적 행사로서 지속적으로 키워간다면 옥천에서의 ‘중봉충렬제’는 그야말로 지역행사로만 그 의미가 퇴색해가지 않을까 우려된다. 


지난해 42회째 시행된 ‘중봉 충렬제’ 역시 좀 더 다양한 각도에서 행사를 주도해 나감으로써 옥천의 이름을 내 건 전국적 문화행사로 확실히 자리매김할 시점이다.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 선생은 경기도 김포 출신으로 일평생 관료, 유학자(성리학자), 교육자, 문인, 의병장으로 활약을 해서 업적을 다양하게 많이 남겼다.
그는 24세에 과거에 급제해 정주․파주․홍주목의 교수와 교서관의 저작․박사(博士)를 거쳐 예조좌랑, 통진현감, 공조좌랑, 전라도사, 종묘서령, 보은 현감, 공주목 교수 겸 제독 등을 역임하면서 정치개혁, 교육개혁, 세제개혁, 국방개혁에 앞장섰다. 특히 중봉 조헌 선생은 서인의 행동대장으로 조선의 엄격한 신분질서 하에서도 하층민인 서리, 서출, 노비들의 편에 서서 일을 했다. 서리들이 부정부패를 하지 않도록 서리(향리)들의 녹봉을 인상하고, 노비 수를 대폭 줄여 양민으로 전환하는가 하면, 서출과 노비들도 능력이 있으면 관리로 등용할 수 있도록 관리채용제도를 개선했다. 한편 그는 청춘과부의 개가(改嫁)를 허용해 여성 해방에도 많이 기여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남의 고경명과 김천일, 영남의 곽재우와 정인홍과 함께 충청도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동년 5월에 보은 수리치제(車嶺)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수차례 의병을 규합하여, 8월 1일에 의병장 영규(靈圭)와 함께 청주성을 탈환했다.
곧이어 의승장(義僧將) 영규(靈圭)와 함께 8월 18일 왜군에게 함락당한 금산 공격을 감행했으나, 후원군이 없는 상태에서 무기 열세, 훈련 부족,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모두 장렬히 순국했다.
왜군들도 타격을 입고 퇴각함으로써 당시 호남 방어의 근거지였던 금산이 회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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