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루(將臺樓)의 멋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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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루(將臺樓)의 멋쟁이
  • 권예자 시인·수필가
  • 승인 2018.05.24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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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예자 시인·수필가

따르릉~ 알람시계가 5시를 알린다.
조금 더 누워있고 싶었지만 얼른 일어나 2시간 예약으로 밥을 안치고 옷을 갈아입고 등산 준비를 했다. 남편을 깨웠지만 피곤하다며 일어나질 않아 할 수 없이 혼자 새벽 등산을 나섰다.

청년광장 옆으로 오르는 문필봉길에는 아카시 하얀 꽃이 금방 튀겨낸 팝콘처럼 가득히 깔려있다. 떨어지는 꽃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눈발처럼 아름답다. 쓸쓸하기는 하지만 각기 다른 모습으로 피어있는 야생화를 하나하나 살피며 혼자 산행을 하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인 것 같다.
보문산 정상인 시루봉의 보문정(寶文亭). 어느 날이나 마찬가지로 이쪽 정상의 사람들은 그쪽을 향하여 야호~ 하고 큰소리로 인사를 하였고, 저쪽에서도 야호~ 하고 응답해왔다. 산에서는 이렇게 모두 친구가 된다.

그런데 오늘은 좀 이상한 광경이 눈에 띄었다. 장대루에서 인사를 하는 사람 중 흰옷을 입은 남자가 유별나게 손을 흔든다. 남들이 다 내려간 후에도 열성적으로 이쪽을 향해 야호를 외치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재미있어 몇 번 응답해주다가 정자에 앉아 땀을 식혔다. 그런데 그쪽에선 계속해서 이쪽을 보며 손짓발짓까지 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참 이상한 사람도 다 있네. 전생에 ‘야호’ 못하고 떠난 사람이 환생 했나? 왜 저렇게 난리람.”
어떻게 보면 우습기도 해서 속으로 중얼거리며 천천히 산에서 내려왔다. 산중턱의 고촉사(高燭寺)엔 어른 주먹보다 큰 크림빛 불도화가 불당 옆에 만발해 웃음을 터트리고 오솔길엔 은은하게 휘감기는 풀 냄새가 풋풋하다.

만날 때마다 새롭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산.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것들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전혀 교만하지 않은 산. 나도 이 산처럼 겸손하고 풍요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집에 돌아오니 등산을 나설 때 잠자던 남편은 언제 일어났는지 샤워를 하고 있다. 식사준비를 하여 식탁에 마주 앉았을 때 남편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오늘 등산 어땠어? 걸어오느라고 많이 힘들었겠네.”
“좋았어요. 그런데 웃기는 일이 있었어요. 건너편 산성 장대루에서 어떤 남자가 시루봉을 향해 계속해서 야호를 외치는 거예요. 꼭 나를 보고 말하는 것 같이. 정말 주책이더군요.”
남편은 묘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더니
“그래? 시루봉에서도 어떤 여자가 산성을 향해 계속 신호를 보내더군. 그 여자 먼데서도 사람 알아보는 것을 보니 눈 하나는 참 높은 것 같던데.” 한다. 나도 같이 맞장구를 치면서
“아무튼, 어디 가나 주책이 있는 거라니까요.” 남편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어이구, 주책은 누가 주책이야. 제 남편도 못 알아보는 사람이 주책이지.”
제 남편이라고? 나는 남편의 말을 되받다가 깜짝 놀라
“아니 그럼 자기가 장대루에서 소리치던 그 사람? 그런데 거기는 어떻게 간 거예요?”
“어떻게 가긴 자다가 생각하니 자기 돌아올 때 너무 힘들 것 같아서 태워 오려고 나섰지. 그런데 산성 쪽으로 갔는지 시루봉 쪽인지 알 수가 없어 산성으로 갔지. 장대루에서 시루봉을 보니 거기 있는 것 같기에, 데리러 간다고 신호를 보냈는데 처음에는 알아보는 듯하더니 그냥 가더구먼. 나 참 기가 막혀서.”
“어머 그랬어요? 미안해요. 어쩐지 흰옷이 너무 근사해 보이더라니까. 당신은 역시 멋쟁이예요.”

나는 남편의 상한 기분을 풀어주려고 웃으며 말했다. 그 먼 거리에서 그가 정말 나를 알아보아서 그랬는지 무턱대고 그랬는지 나로선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돌아올 때 힘들까보아서 자기가 피곤한데도 산성까지 나와 주었다는 그 마음만을 잘 간직하기로 하였다. 웃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 저편에 보문산 자락이 기대고 싶은 푸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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