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레리꼴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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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레리꼴레리
  • 강병철 작가
  • 승인 2020.06.04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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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철작가
강병철작가

 

윤기윤 선생님 이름자는 앞으로 부르나 거꾸로 부르나 그대로 윤기윤이다. 방앗간집 셋째 딸 정은정과 품팔이 옴팡집 일곱째 문기문처럼 거문학교 전교생 팔백 명 중 딱 세 명만 앞뒤로 똑같은 이름자이다. 정은정은 부잣집 딸이니까 졸업만 하면 중학생 세라복을 입겠지만 문기문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읍내 짜장면집 심부름꾼으로 갈 것이다. 맨손으로 밀가루 반죽쳐서 짜장 가락 만드는 기술만 익히면 동창생들 모아 짜장면 시식도 시키겠다고 떠벌떠벌 나팔 불고 다닌다.


“엄칭이 싸게 해 줄 거여.”


그 말 한 마디에 아이들이 손가락을 빨기 시작했고 방앗간집 정은정까지 입술 양끝 올리며 미소 짓는 바람에 내 가슴이 싸-해졌다. 내가 초승달 정은정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죽을 때까지 못할 것이 확실하다.


일제강점기 때는 윤기윤 스승네 땅을 밟지 않고서는 한머리 땅을 돌아다닐 수가 없을 정도로 엄청났단다. 근동 최고의 지주였다가 해방 직후 토지개혁 때 절반 이상을 떼어냈다고 소문만 들었다. 바다로 가는 개울 장금내 마을 초입, 장정 세 명이 팔을 이어도 닿지 못하는 고목나무 아래 고래등 기와집이다.

언제부터였나, 그 지주네 외아들인 담임님이 밤마다 장금내 징검다리를 건너더라고 했다. 저물녘마다 물 건너 징검다리 건너 당재골 옴팡 그 사립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동 트는 여명 어디쯤 다시 스승의 그림자가 신새벽 오솔길 이슬 치며 돌아오곤 한다는 것이다. 그랬다. 옴팡집 투전판에서 새도록 화투패 때리더라고 일곱째 아들 문기문 선수가 쪼쪼쪼 소문내었다. 부엉이가 울고 개울이 울고 가슴에 논문서 품은 사랑방 문풍지도 칼바람 받아 새도록 울었다던가.


다음날 스승님은 두 시간 지나면 꼭 자습을 시켰다. 「동아전과」한 페이지를 칠판에 빼곡히 적으신 다음 교단에 대자(大字)로 누워 한낮의 수면에 빠지시는 것이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베껴만 쓰면 나머지는 우히히 신나는 자습 시간이다. 나중에는 아예 반장 동만이에게 동아전과를 맡겼으므로 우리들은 만화책도 읽고 연필 싸움으로 시간만 때우면 되는 것이다. 코를 골 때마다 얼굴을 덮은 신문지가 들락펼락하고 더러는 겨울잠 자는 곰처럼 아랫배가 허공으로 올라왔다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가라앉곤 했다. 시간이야 어떻든 관심이 없다.


그 늘어진 스승의 몸이 배구시합만 벌어지면 스프링처럼 가벼워졌으니 새로운 변신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허공에 붕 뜬 허리가 뒤로 제켜졌다가 긴 팔 뻗어 배구공 때리면 딱 소리가 담벼락을 쳤다. 중학교 스승들이나 면사무소 아저씨들, 지서의 순경들까지 윤기윤 스승의 강스파이크에 번번이 맥을 추지 못했다. 공이 상대의 네트에 꽂힌 다음 한 바퀴 텀블링 재주 보일 때마다 우리들을 아우성으로 황홀함을 보답했다.


“윤기윤 선생님이 최고 강스파이크다.”


그러나 그 강스파이크 손바닥이 우리들의 볼에 번뜩이기도 했다. 떠들어도 때렸고 구구단을 외우지 못해도 솥뚜껑 손바닥이 비행접시처럼 날아왔다. 도장병 종석이는 빨갛게 달아오른 싸대기만 호오호 비벼대며 종례 때까지 구구단 마치려 안간힘이다. 융육은 삼십육, 치리치리 뼁끼칠, 팔팔이 곰배파리 스바스바 맞고 외우면서 키도 크고 잠지도 영글었다. 뻐꾹새 울며 아카시아 늘어지는 봄이 지나고 뻐꾹뻐꾹 여름 오면서 외운 만큼 똑똑해지기도 했다.


대처에서 날아온 한동한 소년, 백설기처럼 새하얀 지서장 아들이 전학 오면서 거꾸로도 똑같은 이름자가 네 명으로 늘어났다. 이상하다. 나이도 한 살 어린 동급생 한동한이 등장하자 여자 아이들 가슴 쿵쿵거리는 소리가 나한테까지 들리는 것이다.

표준말을 썼고 왕자파스로 그림을 그렸고 운동화를 신었으니 분명히 다른 몸이다. 우리들은 이름자를 조합하며 흠집 내기 작전을 폈다. 조조, 기러기, 이효리, 자지 만지자, 자지만 또 만지자, 묵근놈, 장발장, 소주 만병만 주소처럼 모두 앞뒤 쌍둥이다. 얼레리꼴레리. 정은정과 한동한 거꾸로 똑같은 이름자끼리 보리밭에서 주둥이 박치기했다고 담벼락에 써놓고 보리밭에 숨기도 했다. 금정이도 못 되는 은정이나 은한이도 못 되는 동환이나 그게 짚신짝 수준이라며 시헐시헐 입술을 훔쳐내었다. 그해 유월은 밤꽃 냄새 지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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