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일은 피한다고 돌아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슬픈 소식을 취사 선택하여 들을 수도 없다. 부닥치고 겪으며 헤쳐나가야 만 하는 것이다.
정지용의 1938년, 인생의 겉은 화려하였다. 그는 이 시기에 시와 산문을 다량 발표한다. 시인으로 제 자리에서 제 몫을 단단히 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속으로 곪은 종기들이 밖으로, 밖으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출근하자 모윤숙과 나는 휘문고등 보통학교에 영어 선생으로 있는 J 시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어젯(제)저녁 일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어젯(제)저녁 일이라 함은 천향원(天香圓)이든가 하는 요리집에서 J 시인이 봉변을 당한 것을 말하는 것인데, 그날 저녁 우리들 10여 명이 그 요리집에 갔었다. (중략) 그들은 그가 우리의 보배로운 시인이라는 것을 조금도 모르고 함부로 다루었다. (중략) 이제 그는 그들로부터 실컷 당할 참인 것이다. - 최정희, 「朝光•三千里 시절」, 韓國文壇 裏面史, 깊은샘, 1983, 207-208면. ( )는 필자 주.
최정희와 같이 갔던 요리집에서 시인 J는 기생과 싸움을 한판 벌였다. 싸움의 원인은 서술되지 않아 정확한 유추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J 시인은 그의 체면에 손상을 입을 만한 어울리지 않는 싸움을 벌였다는 것이 기이하다. 악을 쓰는 기생과 맞서 그답지 않은 일을 벌이고 만다. 그는 요리집 남자 종업원들에 둘러싸인다.
최정희와 모윤숙은 최재서가 불러준 택시를 타고 귀가를 한다. 이들은 다음 날 J가 걱정되었다. 그래서 편지를 보낸다.
J는 답장을 보내왔다.
“사내대장부가 야간 체조를 좀 했기로서니 대단할 게 있을까보냐”는 회신을 최정희는 받았다. “사지가 온통 부러진 걸로 짐작했던 모윤숙과 나는 피차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북아현동 살 때 최정희는 정지용의 집과 가까운 곳에 살았다. 그래서 자주 만났다. 그는 술을 마시면 “좋아죽겠다”며 “두 팔을 위로 치켰다 내렸다 하며 펄쩍펄쩍 뛰”던 것이 생각난다고 회상한다(최정희, 같은 책, 208면).
이렇게 슬픔과 기쁨의 상극점에서 정지용은 그것을 화로 분출하기도 하고 때론 온몸으로 털어내기도 하였다.
정지용이 북아현동으로 이사를 하던 1937년 8월,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구상이 병사한다.
이때 그는 최정희가 근무하던 삼천리에 산문시 「온정」, 「삽사리」와 산문 「꾀꼬리와 국화」를 싣는다.
며느리새의 내력을 알기는 내가 열세 살 적이었다.
지금도 그 소리를 들으면 열세 살 적 외로움과 슬픔과 무섬탐이 다시 일기에 며느리새가 우는 외진 곳에 가다가 발길을 돌이킨다. (중략) 바람에 솔 소리처럼 아늑하고 서럽고 즐겁고 편한 소리는 없다. - 「꾀꼬리와 국화」 중에서 (삼천리문학 창간호, 1938. 1)
「꾀꼬리와 국화」에서 정지용은 열세 살 이야기를 한다.
이는 그가 옥천을 떠나 서울에서 기숙하며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고 전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 시절의 기억을, 서른일곱 살의 영어 선생님이 “외로움과 슬픔과 무섬”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솔 소리”에 위안을 얻는다.
“우리의 보배로운 시인”으로 화려했던 정지용의 1938년은 외롭고 슬펐다. 그러나 때론 “좋아죽겠”을 때도 있었다. 이 또한 정지용의 선택과 무관하게 또는 우연히 찾아오고 스러져갔던 것은 아닐까?
허튼 생각이 많아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