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포상 기준에 대한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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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포상 기준에 대한 의문
  • 오택원(전 동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장)
  • 승인 2021.01.28 14: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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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막심한 외세 침탈의 주역은 이웃 국가인 중국과 일본이었다. 그 가운데 최근세의 외침(外侵)은 일제가 자행했다. 


일제의 침탈로 인한 악랄한 탄압과 약탈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음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정신적 피폐에 더하여 인적 물적 손실은 참으로 엄청났다. 당연히 우리 민족의 기억 속에 생생하다.
이에 맞서서 혹독한 시련 앞에 목숨을 걸고 당당하게 몸을 날린 수많은 의인들이 계셨는가 하면 나름대로 헤쳐나갈 길을 헤아리고 끊임없이 도모했던 시대의 선각자 또한 우뚝했다. 


모두 민족의 존경을 받아야 할 시대적 영웅들이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깊숙이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까지 속속들이 세밀하게 살펴서 유공자의 명예를 받들어 올리고 있다.
국가 유공자 중에는 일제의 억압에 맞섰던 독립유공자들의 숫자가 가장 많은 듯하다. 시기적으로 가장 가깝고 가장 어려웠고 그래서 그 시련 또한 가장 아프고 쓰라렸던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의 활동과 업적만을 대상으로 그 공을 포상한다는 것이다. 


일제의 조선에 대한 야욕이 경술국치 이전부터였음은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고 가르쳐 왔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가 그들의 자만심으로 표출되고 결국엔 1905년의 을사늑약을 체결하며 마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에 격분한 민족 선각자들이 앞장서서 민중 계몽 운동으로 동포들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아니하고 구국의 길에 나선 것이다.


이제 냉정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1910년 이후의 공적만이 포상 대상이라는 기준은 어디서 연유한 것이며 과연 타당한 것인지, 그 이전의 선각자들의 공적은 그 이후보다 왜 덜한 것인지를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 


바람 앞의 등불 같았던 민족의 운명에 신명을 바치신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에 옷깃을 여민다. 영령들의 넋을 받들고 위로함에 있어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그분들의 행적을 경건하게 살펴서 정당한 평가와 그에 따른 포상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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