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현(혹은 침현)과 관산성 전투와의 관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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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현(혹은 침현)과 관산성 전투와의 관련성
  • 이주우 옥천향토사 연구회 회원
  • 승인 2023.04.06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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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언급된 탄현(혹은 침현) 지형은 한 사람이 단창으로 만 명 당해낼 수 있는 요지이고 탄현(혹은 침현) 안으로 끌어 드려 공격하면 닭장에 든 닭이나 그물에 걸린 고기로 표현될 수 있는 지형이다. 한 명이 단창으로 만 명을 당해낼 수 있는 요지는 자연 지형이 성과 같이 급경사이고 한 곳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접근이 어렵고 방어에 유리한 지역으로 식장산이 옥천 쪽에서는 급경사이고, 쑥고개 양옆의 할아비 산성과 할매산성은 쑥고개를 제외하고는 옥천 쪽에서는 접근이 거의 불가능하다. 

쑥고개(탄현)는 고갯길도 경사가 급해서 자모리, 갯골 쪽은 고개의 폭을 넓게 하여 갈지자 형태로의 흙길로 급경사를 보완하였으나 지금은 무너져 그 흔적만 있고 오동리 무중골쪽은 일반 고갯길과는 다르게 인공적으로 돌로 석축을 쌓아 길을 만든 고개다. 고개 아래는 군사들의 숙영을 했을 것 같은 평평한 숙영지의 흔적이 있다. 이는 쑥고개(탄현)가 일반 백성이 다니는 오솔길의 고개가 아닌 백제가 필요해서 경사가 급한 고개를 돌로 인공적인 보완한 고개로 보인다.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가서 소롯길을 따라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하고 그때 군사를 풀어 공격하면 신라군은 닭장에 든 닭이나 그물에 걸린 고기가 된다. 닭장에 든 닭이나 그물에 걸린 고기로 표현할 수 있는 지형은 주변에 산성이 많아 산성에서 모든 움직임을 관측할 수 있어 숨을 곳이 없는 곳을 말하는 것이고 포위된 신라가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도 백제 산성에서 언제든지 제한, 통제가 가능한 지역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지역은 산성으로 둘러싸인 벌판(대청댐으로 수몰됨)으로 주변에 개머리산성, 마산동산성, 국사봉보루, 옥천 대정리산성, 항곡리(사현)산성, 백골산성, 갈현성, 능성, 질현성, 질현성, 계족산(우술)성이 있다. 산성이 전쟁 관련 지명으로 백골산과 핏골이 있다. 핏골전설과 소태고개 전설은 대전지명지에 대전 동구 직동 핏골은 백제와 신라군이 싸워서 피가 내를 이루었다 하여 피골이고 소태고개은 백제 군사들이 노고산성에서 군량을 운반하려 나왔다가 신라군과 마주쳐 싸웠으며 이 싸움으로 시체들이 사태가 나서 ‘사태 고개’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에 위덕왕이 포위를 당해 왜군의 방어로 샛길로 탈출했는데 샛길로 추정되는 곳을 넘으면 용목리(용이 목욕한 마을 전설)가 나오고 독골재로 빠지면서 고리산 밑에 매복한 백제군이 위덕왕을 추격하는 신라군을 공격하여 백골산 넘어 대전 쪽으로 신라군을 몰아넣었을 때를 표현한 기록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탄현 혹운 침현으로 같은 곳인 것처럼 기록된 이유는 쑥고개(탄현)에서 항골(항곡리)쪽 계곡 사진으로 탄현에서 황골전설의 전투가 뺀히 보인 지역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탄현 혹운 침현에서의 전쟁은 관산성 전투이고 관산성 전투의 결과 백제는 관산성의 일부를 660년까지 점령한 것으로 삼국사기를 통해 알 수 있다.

관산성전투 전쟁 시기와 백제의 공격 경로로 관산성 전투 시점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및 신라본기에는 554년 7월인데 일본서기는 554년 12월 9일 시점이다. A 교수는 일본서기 유지신이 왜군을 거느리고 백제에 도착한 시점이 6월로 이유 없이 왜군을 12월까지 장기 주둔으로 신라에 정보 노출할 이유가 없는 점을 감안 시 전쟁 시점을 554년 7월로 보았고 성왕의 여창 위로 등을 감안 시 관산성 전투는 554년 7월에 개전하여 12월까지 지속된 장기전으로 볼 수 있다고 하여 관산성 전투를 전개하면서 그때그때 시기를 말하고자 한다. 

먼저 백제의 공격 경로로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공격 경로는 B 교수는 부여에서 출발하여 옥천지역인 관산성에 당도하였고 승세를 굳힌 후 여세를 몰아 보은·영동·상주·안동 등을 거쳐 경주까지 쳐들어갈 계획이었다고 했다. A 교수는 지금의 부여(사비도성)→황산벌→진산→마전→옥천(관산성)→보은(삼년산성)→상주→경주(금성)로 이어지는 루트로 보고 있다며 백제의 관산성 전투 목표가 관산성이 아니라 경주임을 보여준다고 했다. 

관산성 전투의 원인이 신라 나제동맹의 배신에 대한 복수라면 목표가 상주 점령으로 서울과 경주를 끊든가 아니면 경주까지 공격하는 것이 목표였을 것이다. 그러나 부여에서 관산성까지의 경로는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지 않아 일본서기와 관산성 전투의 시점인 음력 7월 그리고 옥천 지형을 근거로 언급하고자 한다. 

일본서기에는 12월 9일에 사라(斯羅)를 공격하러 보내면서 신이 먼저 동방 의령인 물부 막기무연을 보내 자기 방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산성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라고 기록이 있어 왜군이 소속된 백제 동방 군사가 선공한 것으로 보이는데 선공하는 군사는 보통 주력이다, 일본서기에 모순되는 기록이 있다. “여창이 신라를 정벌할 것을 계획하자 기노가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다고 간하였다. 여창이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 우리는 대국을 섬기고 있으니 어찌 겁낼 것이 있겠소.”라 하고, 드디어 신라국에 들어가 구타모라에 보루를 쌓았다는 기록은 여창이 들어간 신라에 왜군은 들어가지 않은 것 같다. 

이유는 함산성 공격 시 기술 내용 구체적인 반면에 구타모라새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관산성 전투의 총사령관으로 볼 수 있는 여창과 동행을 하지 않고 신라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왜군이 배속된 동방 군은 백제의 주력이 될 수 없다. 왜 일본서기에 선공하였다는 기록되어 있는지 알아보면 대체로 전쟁의 개시 시 어느 나라든 유리한 조건을 최대한 활용한다. 전쟁 시점인 음력 7월은 음력 7월 15일이 백중으로 들에 곡식이 익기 시작한 시기로 육로를 통한 전쟁은 농민들의 반발이 있을 수 있고, 반면에 장마가 끝나는 시기로 금강에 많은 물이 흐르는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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