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맞이 남단의 산청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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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남단의 산청 기행
  • 배정옥 수필가
  • 승인 2023.04.27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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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전령사 산수유가 만개하고 연이어 매화꽃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목련꽃도 가지마다 촛불을 밝히듯 환하다. 작년에 보았던 꽃이 오늘도 피어 환하게 웃고 눈물처럼 꽃잎들이 지고 있다. 사람들의 삶도 자연이 주는 선물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 자연 속에 완숙해지며 살고 싶을 것이다.

아직은 찬바람이 옷 속으로 파고드는 3월 말이다. 한 달 전부터 아니 1년 전부터라 해야 맞을 것 같다. 꼼꼼히 체크하고 계획하여 남단의 산청으로 향했다. 한의학의 선구자 ‘동의보감’을 쓰고 책으로 펴내어 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에 등재된 허준의 스승, 유의태 그의 고향은 산청이다. 창밖의 풍경은 봄 햇살로 화사하고 가는 길목마다 노랗고 붉고 하얀 꽃들이 ‘우우우’ 환호를 했다. 쭈욱 곧게 뻗은 대진고속도로가 오늘따라 활력이 넘쳐 나는 듯하다. 남으로 갈수록 스치는 산등선마다 연분홍 진달래가 활짝 피고 있었다.

첫 일정은 목면시베지였다. 기다리고 있던 해설사 선생님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의류의 혁명을 일으킨 문익점 선생님의 고향이기도 하다. 선생은 원년(1331년) 2월에 태어나셨다. 충성심이 강하고 부친상의 시묘살이를 할 정도로 효행이 남달랐다. 33세에 좌정언이 되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목면나무의 씨앗을 가지고 들어왔다. 당시의 붓두껍에 목화씨를 몰래 숨겨서 가지고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도 배웠던 기억에 흥미가 한층 더 가증되었다. 이는 후대에 그의 업적을 추앙하는 과정에서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덧붙여진 이야기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의 태조 7년 6월 13일 자에는 “길가의 목면나무를 보고 그 씨10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장인 정천익에게 5알을 주며 꼭 꽃을 피워 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심은 목화씨는 다 죽고 말았다. 정천익이 심은 목화 가운데 오직 한 알만이 싹을 틔웠다. 

문익점은 헐벗은 백성들을 생각하며 하늘에 빌었다. 꼭 성공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재배에 성공한 목화는 10여 년 만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우리나라 목화의 시발지에서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며 내가 입고 있는 의복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며 온몸이 따스함을 느꼈다.

다음 장소는 불교계의 큰스님이셨던 성철스님의 생가 겁외사이다. 겁외사는 전국에 있는 15곳의 성철스님 문도 사찰 중 한 곳이다. ‘상대의 유한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이라는 의미로 생가터에 세운 사찰로서 성철스님이 현판의 명칭을 직접 지으셨다고 한다. 성철 큰 스님은 1912년 2월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1993년 11월 해인사에서 “참선을 잘 해라”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82세에 열반에 들었다. 그는 이 땅에 태어나서 부처의 길을 택하여 평생토록 오직 진리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무소유와 청빈의 정신으로 우리시대의 부처의 모습이다. 생가 마당에 자리 잡고 있는 성철 스님의 법어에는 ‘자신을 바로 보라’ ‘남을 위해 기도하라’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라’는 참되고 소박한 가르침은 오늘도 가야산의 메아리가 되어 영원에서 영원으로 울리고 있다.

사찰 입구에는 일주문이 있어야 할 곳에 18개의 원형 기둥이 받치고 있는 누각이 있다. 누각에는 ‘지리산 겁외사’라고 쓰여 있다. 사찰 마당에 들어서니 담장 쪽으로 소나무와 동백꽃이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대웅전과 스님들이 정진하는 심경당과 요사채가 있었으며 마당 중앙에는 성철스님의 동상이 우람하고 근엄하게 서 있었다. 그 앞 염주와 목탁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그의 위엄과 성글성글 호탕한 모습과 큰 법문에 내가 빙산에 일각처럼 작아진 것 같다. 대응전 내부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본존으로 모셔져 있었다. 또한 한국 수묵화 대가인 김호석 선생이 배채법으로 그린 성철스님의 진영이 함께 모셔져 있다. 건물 벽화에는 성철스님의 일대기가 담겨져 있다. 그 그림 속에 금강산의 일천만의 봉우리가 그려져 있고 어머니를 없고 산을 오르시는 모습이 내 눈길을 잡아당겼다. 절에서 수행을 하고 있는데 부모님이 계속 찾아오자 참선에 방해가 된다하여 더 멀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셨다. 

그는 삼천만 석의 부잣집 7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부러운 것이 없었다. 24세 늦은 나이에 출가하게 된 것은 그의 부모님의 반대 때문이다. 그의 부모님들은 그의 출가를 막기 위해 물고기를 잡게 하여 살생을 하게 하였으나 허사였다. 나중에는 어머니와 딸마저도 출가를 했다. 그는 정좌불을 8년이나 실행하였으며 그가 열반에 들었을 때 그의 사리가 134과가 나왔다. 그의 명언들을 보면 성철스님의 말씀 중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 뜻은 “원각이 보조하니 적과 멸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시회대중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 외에도 출가하는 심경을 노래한 출가시와 도를 깨친 오도송 노래가 있고, 그가 열반에 들면서 남긴 마지막 가르침인 열반송이 있다.

“하늘에 닿을 큰일도 화롯불에 눈송이요. 바다 건널 큰 기틀도 햇살 속 이슬일세. 누구라서 꿈 같은 세상 살다 달게 죽으랴, 만고의 진리 향해 나 홀로 걸어가리” -출가시

“황하수 곤륜산 꼭대기로 흘러 올라가니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땅이 꺼지도다. 문득 한번 웃고 나서 머리 돌려 서니 청산은 예대로 흰구름 속에 있네” -오도송

“한평생 남녀 무리들을 속여서 하늘 닿을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치네. 살아서 지옥에 떨어진 한 만 갈래인데 붉은빛 토하는 둥근 해 푸른 산에 걸렸네” -임종계

생가 뜰에 명자꽃 붉은 꽃송이가 터질 듯 벙글어 있다. 사람의 인연은 일겁일만겁의 인연으로 만난다고 한다. 부부와 자식과도 우리의 인연은 그토록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남을 위해 얼마나 베풀고 남을 위해 기도하며 살까. 나는 지나온 삶의 멍든 모서리에서 잠시 아프더라도 더 아팠던 날들을 생각하며 주변의 인연을 생각해 본다. 생가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율은재 앞 우물물이 조심스럽게 떨어지고 있었다. 나지막이 흐르는 물소리가 낭낭한 소리로 법문을 읽는 듯 잔잔하게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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