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무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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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무 의병장
  • 전순표 옥천향토전시관장
  • 승인 2023.06.08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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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군수 박춘무 3대가 의병 창의   

 옥천군수 박춘무(朴春茂 1544년~1611년) 의병장은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동생 박춘번, 아들 박동명, 손자 박홍원 3대에 걸쳐 의병을 일으킨 만고에 빛나는 충신이다. 

 박춘무 의병장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청주 복대리에서 1천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중봉 조헌 의병장, 의승장 영규대사와 함께 8월 1일 청주성 탈환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의병장이다. 

중봉 조헌과 토정 선생 제자, 침술 대가

 특히 조헌 선생과 이산해 등과 함께 『토정비결』을 지은 이지함 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고 그의 수제자로 침술의 대가로 피난한 선조 왕의 부름을 받고 의주까지 가서 왕을 직접 시침하고 왕세자, 대군, 공주 등 왕실 가족에게 침술을 베풀며 의관으로 왕을 호가했다.
 박춘무 의병장은 청주시 강서면 용정리에서 1544년(중종 39년) 태어났다.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호는 화천당(花遷堂), 관직은 옥천군수, 정유재란 때 임천군수, 인천부사, 부평도호부사를 지냈다. 시호는 민양공(愍襄公)이며 후에 우참찬에 추증되었다. 저서는 『화천당집』이 있다.

 1592년 4월 13일 왜군은 부산포에 상륙하여 동래성을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황간-청산을 거쳐 보은, 회인, 6월 초순 제3군 선봉장 구로다가 지휘하는 일본군이 청주성을 점령했다. 이 당시 청주를 지키던 관군 이옥 방어사는 도망치고 함락된 청주성은 하치스카 이에마사 왜장이 지켰다.

 박춘무 의병장 청주에서 4월 하순부터 사방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이 700명에 이르렀고 청주의 서부지역인 흥덕구 비하동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이 있던 부모산에서 종사관 이시발(李時發) 등과 훈련하며 죽음으로써 청주성을 되찾을 것을 맹세했다.

청주 복대리 거병, 청주성 탈환 큰 공

 마침내 그해 7월 4일 종사관 한혁과 아우 박춘번, 아들 박동명을 선봉장으로 1천여 명의 박춘무 의병부대는 청주 복대리에서 거병했다. 그리고 구로다(黑田長政) 왜군이 점령하고 있는 청주성을 수복을 위한 작전을 개시한다. 7월 하순에 중봉 조헌 의병부대과 의승장 영규대사 의승부대, 관군 등 연합군 3천6백 명으로 함께 청주성 탈환작전을 개시했다. 박춘무 의병부대는 청주성 남문, 조헌 의병과 영규대사 승병은 서문을 야간에 기습했다. 우리 연합부대는 청주성으로 기어 올라 맹렬히 왜군을 격파하고 때마침 소나기가 내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적군을 격파하니 북문으로 일본군이 도주했다. 마침내 8월 1일 청주성을 탈환하여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조선의 첫 승전보를 울리기는 쾌거를 이뤘다. 

 이후 중봉 조헌 의병장은 전라도 곡창지대로 진출하려는 일본군을 금산에서 방어하려고 떠났고 박춘무 의병장은 청주서 진천으로 도주한 왜군을 추격했다. 청주성 탈환 후 공론에 따라 조헌 의병장은 호서좌의대장, 박춘무는 호서우의대장이 되어 좌의대장은 금강 이남을, 우의대장은 금강 이북의 일본군을 상대하여 싸우기로 했다.

진천 탈환 후, 수원, 한양부근 맹활약

 박춘무 의병장은 8월 중순 진천을 포위하고 공격하기에 앞서 함께 종군하던 아들 박동명에게 “전쟁터에서 용기가 없는 것은 효가 아니다”라고 훈계했다 한다. 밤이 되어 의병군으로 하여금 적의 약한 남쪽을 급습하여 달아나게 하고 천여 명의 의병 장사를 투입, 일본군의 후진을 무찔러 대승을 거두고 진천을 탈환했다. 이어 박춘무 의병부대는 김천일 의병진과 합류하려고 경기도 수원방면으로 북상했다. 그러나 김천일 의병부대가 당초 작전을 바꿔 강화도로 부대를 이동함으로 박춘무 의병부대는 한양 부근에 활동했다.

 그의 문집 『화천당집』에 따르면 “그의 의병부대가 이르는 곳마다 왜적이 두려워하여 경계할 뿐 감히 공격하지 못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박춘무 의병진의 용맹무쌍한 명성이 당시 왜군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을 알 수 있다.

임란 공훈 옥천군수 제수, 우참찬 증직

 위와 같은 의병활약의 전공으로 1596년 옥천군수에 제수되었고 1598년 정유재란이 일어남에 따라 그간 의병전투 공훈을 인정받아 ≪절충장군 겸 첨지중추부사≫에 임명, 중앙군 용양위 책임자가 되었다. 이어 침술과 의술이 뛰어나 왕과 세자 병환을 담당키 위해 한양서 가까운 임천군수, 인천부사를 제수, 부평도호부사는 불취하고 귀향, 학문과 후학양성에 힘썼다.

 임진란 공훈으로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고 가선대부 형조판서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또 의정부 우참찬 겸 오위도총관에 추증됐다. 청주시 비하동 주봉마을에는 박춘무 의병장 등 함께한 임란 의병 8위를 기리는 민충사가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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