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곧은 선비 수옹 송갑조 선생
상태바
올 곧은 선비 수옹 송갑조 선생
  • 전순표 시인 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23.07.20 15: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송시열 아버지, 이원 구룡촌 장가 와
 
수옹 송갑조(宋甲祚) 선생은 세한재 송시도와 우암 송시열 선생의 아버지로 조선 중기 문신이며 성리학자이다. 그는 의빈부도사 송응기와 광주이씨 사이에서 1574년(선조 7년)에 한양 반송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광주 이씨(光州李氏) 어머니를 여의고 어머니가 데려온 유모 헌비에 의해 양육되었다. 최립의 문인이며 서인이다.

충신의 딸에게 장가, 훌륭한 자식 둬
 
옥천에서는 “충신의 딸에게 장가가야만, 훌륭한 아들을 낳는다 하여 옥천 이원의 선산곽씨 부인에게 장가가서 송시열 선생 같은 훌륭한 인물을 낳을 수 있었다는”일화가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조헌 의병의 편장으로 활약한 장인 곽자방(郭自防) 충신의 딸인 선산 곽씨(善山郭氏)에게 장가들어 처가인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에서 살았다.

 송갑조 옹의 자는 원유(元裕)이며 호는 수옹(睡翁)이고 본관은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증조부는 대사헌 송인수이다. 그는 천성이 강직하고 지조가 굳어 불의와 타협할 줄을 몰랐다.

서궁유폐 인목대비 배알, 유적 삭제
 
1617년(광해군 9년)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때 인목대비 폐모론으로 북인들에 의해 인목대비께서 서궁에 유폐되자, 그는 이 같은 불의에 분노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비밀리에 서궁의 인목대비를 배알하고 돌아왔다. 폐비된 인목대비를 알현하고 유폐를 반대하였다고 유적에서 삭제되었다. 이에 두문불출하다가 옥천에 낙향하여 관직을 단념하고 성리학 연구와 공맹자와 이이와 성혼의 저서들을 섭렵하고 학규를 엄격히 하며 후약양성에 힘썼다.

 그 후 1623년 인조반정이 있은 후에 인목대비께서 유폐되었던 서궁에서 벗어나자, 자신이 10년 동안 서궁에 갇혀 있을 때 “그래도 신하로서 지조를 지키고 신하의 도리를 다한 사람은 송갑조 뿐이다”라고 칭찬하면서 강릉참봉에 천거했다.

인목대비 천거 강릉참봉 제수
 
1624년(인조 2년)에 인조반정 때 공신인 평안병사 이괄이 논공행상에서 우대받지 못하자, 일으킨 이괄의 난 때 송갑조는 공주로 왕을 호종하여 난이 평정된 후에 전주의 경기전 참봉으로 조산대부로 승진하였다. 1627년(인조 5년) 사옹원 봉사로 승진하여 상경하는 도중에 청나라의 칩입으로 정묘호란이 일어나서 소헌세자 일행을 만나 전주로 호종하였다. 그 뒤에 후금과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사직서를 제출하고 그 길로 옥천 집으로 귀향했다. 이후 어룡정사(御龍精舍)에서 시문과 독서로 소일하며 후학을 가르치다가 1628년(인조 6년)에 54세의 일기로 옥천에서 생을 마쳤다.

유모 헌비 묘비 세워줘
 
송갑조 선생은 인간미가 넘치고 자상한 사람으로서 노비와 그의 아들 강수문에 대해서도 친 가족처럼 대했다. 그의 유모가 죽었을 때 후의 장례를 치러 주었고 아들 송시열도 생전의 아버지 뜻을 받들어 1689년 유모 헌비의 묘비를 세워 주었다. 송갑조 선생은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아들 5남 2녀를 훌륭히 양육하고 교육했으며 아들 송시열 선생이 우의정에 오르자, 송갑조 옹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저서로는 『수옹일기』가 있다.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에 살던 집터에는 「수옹 송갑조유기비」가 있고 이 마을 금강의 산기슭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58호인 경현당이 있다. 이곳은 그간 학자와 선비들이 시회와 강론을 열었던 곳이다. 특히 구한말 때 8대손 문헌공 좌의정 송근수 대감과 9대손 송병선 대사헌 등이 유림들과 우암 송시열의 『송자대전』 가운데 난해한 구절을 뽑아 주석을 붙인 『송자대전수차』가 있다. 또한 1677년(숙종 23년)에 지은 경현당(景賢堂) 옆에 지금은 허물어 없어진 용문서당이 있었고 이 서당에서 어릴 적에 송시열 선생이 공부했다. 

 그의 묘소는 대전 동구 판암동 쌍청당 회관 뒷산의 회덕 송씨 선영에 있다. 처음 묘비명은 청음 김상헌 선생이 짓고 신독재 김집 선생이 썼다. 후에 훼손되어 이조판서를 지낸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선생이 비문을 지었다. 그리고 송준길의 상소로 효종 때 증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고 1660년(현종 1년)에 송시열의 노력으로 증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되었다. 또 영조 때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어서 윤봉조의 상소로 경헌(景獻)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