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목민관, 의복·표리일습 포상, 양양에 선정비, 경주부윤 올라
정기풍(鄭基豐) 옥천군수는 1594년(선조 27년) 임진왜란 초기에 태어난 조선 중기 대기만성형 노력파 문신이다. 그는 21세에 생원이 된 이후 관직에 나가 하위직에 머물다가, 옥천군수를 지내며 55세에 대과에 급제해 문학, 양양부사, 우부승지, 경주부윤을 역임한 문신이다.
경상도 초계, 지금 합천군 초계 본관
정기풍 군수는 강원도 원주 출신으로 자는 형백(亨伯)이고 본관은 초계 정씨(草溪鄭氏)이다. 초계(草溪)는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동부 지역인 초계면이다. 옥천 안남면의 독락정을 건립한 절충장군 주몽득 선생을 배출한 명문가 초계 주씨(草溪周氏)의 본관이 바로 경상도 초계다.
정 군수 아버지는 절충장군 행충무위부호군 정약(鄭爚)이며 부인은 이박의 딸이다.
정기풍 군수는 1615년(광해군 7년)에 식년시 생원에 합격해 관직에 나가 인조 17년(1639년) 부사과를 지냈고 1642년(인조 20년)에 황해도 동북부의 신계현령을 역임했다. 그때 암행어사 정치화(鄭致和)를 통해 선정을 베푼 현령으로 보고되어 임금께서 의복을 하사했다. 1642년 내직인 공조정랑(工曹正郞)에 임명되었다.
국사진심, 애민관, 표리일습 포상
1646년(인조 24년) 11월 12일 옥천군수를 제수받았고 1648년(인조 26년) 55세에 식년시 문과에서 병과 8위로 급제하였다. 그리고 효종 즉위년(1649년) 12월 12일 자 『승정원일기』 기록에는 홍청좌도 암행어사가 치적이 있는 수령에 대한 포상을 임금께 재가를 청하는 이조 계목 따르면 “옥천군수 정기풍(鄭基豐)은 군수로 국사에 진심이며 백성을 사랑으로 돌봐 표리일습을 포상했다”라고 기록하였다.
55세 대과급제 대기만성 옥천군수
정기풍 군수는 55세 늦은 나이에 1648년(인조 26년) 식년시 문과에서 병과 8위로 대과 급제하였다. 이후 옥천군수(沃川郡守)로 재직하던 1650년(효종 1년) 6월에 내직인 문학(文學)에 임명되었다.
이에 대해 『효종실록 4권』 1650년(효종 1년) 6월 21일자 기사에서 “~<상략>~ 이천기를 헌납으로, 옥천 군수 정기풍(鄭基豊)을 문학으로, 공산 현감 이태연을 수찬으로, 충원 현감 이진을 부수찬으로 삼았다”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1644년(인조 22)에는 채문영이 심기원(沈器遠)의 모반 사건과 연관되어 충주목이 충원현으로 강등되었다. 이 때문에 도(道)의 명칭도 충청도에서 홍주목과 청주목의 앞 글자를 따서 홍청도(洪淸道)로 바뀌었다.
옥천 정립 선생 62세 대과급제
한편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한 옥천 출신 고암 정립(鄭雴) 선생은 환갑을 넘긴 62세에 대과에 급제한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후세에 큰 귀감이 되고 있다. 그는 뒤늦게 관직에 출사하여 목민관으로 진해현감과 경상도사, 군자감정과 80세에 판사를 역임한 동이면 적하리 하동 정씨 명문가 출신 성리학자이다.
양양부사 선정비, 경주부윤 올라
이후 정 군수는 사간원 사간과 사헌부 정4품직인 장령을 지냈고 지평, 사헌부 종3품 집의, 필선 등을 역임하였다. 효종 2년(1651년) 8월 17일 효종 임금이 정기풍를 직접 불러 유시하고 강원도 양양부사로 보내서 효종 4년(1653년) 8월까지 2년 동안 재임하였다. 현재 강원도 양양읍 현산공원에는 부사 정공기풍 선정비(府使鄭公基豊善政碑)가 남아있다. 정기풍 선정비 서체는 해서체이며 크기는 높이 130㎝, 너비 49㎝, 두께 19㎝이며 비갓이 있다.
그 후 장령, 지평, 집의, 필선 등을 역임하였다. 1658년(효종 9년) 5월에 조복양(趙復陽) 등과 함께 우부승지(承旨)에 임명되었다. 1658년(효종 9년)에 집의를 거쳐 정기풍 군수는 왕을 측근에서 보좌하는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 현종 3년(1662년)에는 종2품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이르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