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다시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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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다시 해보자”
  • 전상인 국회의원 보좌관
  • 승인 2026.06.25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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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가 비춘 우리 교실] 넷플릭스 「참교육」 앞에서, 향수의 고장 옥천에서 교육을 다시 생각합니다


바쁜 일상을 잠시 뒤로하고, 어느 밤 저는 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에 빠져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통쾌한 액션물 한 편을 가볍게 보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회를 거듭할수록 화면 속 교실이 자꾸만 제 가슴을 두드렸습니다. 그것은 드라마가 아니라 우리가 오래 외면해 온 현실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유독 더 아프게 와닿은 까닭이 있었습니다. 

저는 사교육을 다년간 현장에서 아는 사람이라 드라마라는 이름 뒤에서 무엇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봐 온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한 남자가 무너진 교실 문을 엽니다. 책상은 나뒹굴고 아이들은 선생님을 비웃으며 한 교사는 구석에서 어깨를 떨고 있습니다. 특전사 출신의 교권보호국 감독관 나화진, 그는 흐트러진 질서를 단숨에 바로 세우고, 끝내 가장 모질게 굴던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나직이 말합니다. 

“괜찮아, 다시 해보자” 공개 사흘 만에 전 세계 비영어권 시리즈 1위, 48개국 시청 순위 10위 안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 보고 난 제 마음에 남은 것은 후련함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먹먹함이었습니다.


머나먼 나라의 한 교사가 보내온 “고맙습니다”

나화진을 연기한 배우 김무열은 한 인터뷰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멀리 말레이시아의 한 교사가 ‘이 작품을 보고 위로받았다,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한 시청자는 ‘우리 학교에도 꼭 이런 일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교실이 흔들리는 풍경은 안타깝게도 우리만의 일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그는 부모가 되어 보고서야 한 대사의 무게를 알았다고 했습니다. 훈육에 감정이 끼어드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가르침이 아니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정답을 비워 두었습니다. 천 명이 보면 천 개의 답이 있을 테니 진짜 ‘참교육’이 무엇인지는 저마다 가슴에 담아 가시라고 말입니다. 저는 그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습니다.

드라마가 끝난 자리, 댓글창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교실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악성 민원만 줄어도 참다운 교육이 될 텐데’라고 적었고 또 누군가는 ‘몇몇 아이 때문에 나머지 아이들이 배울 권리까지 짓밟힌다’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부당한 매가 문제였는데 지금은 중심을 잡아 줄 곳이 없는 것이 문제’라는 한 줄에는 수천 개의 공감이 달렸습니다. 통쾌하지만 씁쓸하다.그 두 감정의 공존이야말로,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보낸 가장 정직한 마음이었습니다.


학교는 벽돌로 서지만, 진짜 학교는 한 사람으로 완성됩니다

드라마를 보며 저는 오래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학교’를 말하고 ‘교육’을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한 아이의 평생에 남는 것은 학교라는 건물도 교육이라는 거대한 말도 아닙니다. 

학교는 벽돌과 운동장, 복도와 종소리로 서 있지만 진짜 학교는 끝내 ‘한 사람’의 선생님으로 완성됩니다. 어른이 되어 돌아보면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교실의 크기가 아니라 더딘 걸음을 끝까지 기다려 주시던 선생님의 눈빛, 무심코 건네주신 말 한마디였습니다.

‘교육’이라는 말은 명사로 웅장하지만 ‘학생’은 저마다 다른 이름과 표정을 가진 살아 숨 쉬는 한 아이입니다. 우리는 ‘교육’을 소리 높여 외치느라 정작 눈앞의 ‘한 아이’를 자주 놓치곤 합니다. 성적표의 숫자 뒤에는 아침마다 가방을 메고 들길을 걸어오는 한 아이의 하루가 있고 그 아이를 마중하듯 교문 앞에 서 계신 선생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봄이면 운동장 벚꽃 아래에서 선생님은 뒤처진 아이의 손을 잡고 한 걸음을 함께 떼어 주십니다. 그 더딘 기다림, 그 한 걸음이 바로 교육이었습니다. 제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교육은 비로소 숨을 쉽니다.

교육은 거대하고 학생은 작지만 그 작은 한 아이를 지키지 못하는 교육은 아무리 거창해도 이미 길을 잃은 것입니다.

아이들도 그 사실을 압니다. 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드라마 소감을 물었더니 아이들이 하나같이 선생님 편에 섰다고 합니다. ‘교권이 바로 서야 교육이 바로 선다’는 말을, 다름 아닌 아이들 입에서 들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아이들이 ‘차라리 회초리가 필요하다’는 데까지 나아간 대목에서는 어른인 제가 도리어 가슴이 서늘해졌습니다. 매를 겪어 본 적도 없는 아이들이 매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오래 교실을 외롭게 내버려 두었다는 뼈아픈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드라마가 판타지를 불러낸 진짜 이유

드라마 속 한 어머니는 아들을 의대에 보내려 끝내 불법 약까지 구합니다. 과장이라 웃어넘기기에는, 그 광기의 뿌리가 너무도 낯익습니다. 공교육의 교실이 조용히 흔들리는 사이 사교육은 어느새 거대한 시장으로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시장이 정치·정책과 얼마나 촘촘히 얽혀 돌아가는지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봐 온 사람입니다. 입시가 사교육을 키우고 비대해진 사교육이 다시 제도와 여론을 흔드는 동안 정작 공교육의 교실은 뒷전으로 밀려 점점 더 외로워졌습니다.

교권의 추락은 그 외로움의 한 단면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현실에는 있지도 않은 ‘교권보호국’에 그토록 열광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의 시스템이 교실 하나, 선생님 한 분, 아이 한 명을 끝내 지켜 주지 못했다는 가장 또렷한 신호입니다. 드라마가 판타지를 불러낸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한 토막 짧은 영상으로 시작된 이 이야기가 순식간에 온 나라의 화제가 되고 잊혔던 교육 문제를 다시 공론의 한복판으로 끌어올린 것도 그래서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조심스레 경계하고 싶습니다. 논의가 ‘얼마나 더 세게 벌할 것인가’로만 흘러 버리면 정작 우리가 물어야 할 ‘어떻게 함께 지킬 것인가’라는 질문은 뒤로 밀려나고 맙니다. 통쾌함은 한순간이지만 교육은 한 사람의 평생이기 때문입니다.


화면을 끄고, 옥천의 밤을 바라보며

화면을 끄고 거실창을 여니 옥천의 밤이 깊습니다. 

향수(鄕愁)의 시인이 노래하던 그 실개천이 옛이야기처럼 휘돌아 나가는 땅, 금강과 대청호의 물안개를 품은 이 고장에도 작은 학교들이 있습니다. 

전교생이 채 몇십 명도 안 되는 학교, 해마다 폐교를 걱정하는 면 단위 학교들입니다. 그 교실에도 아이 이름을 하나하나 외우시고 늦은 퇴근 무렵까지 불을 끄지 못하시는 선생님들이 계십니다. 그 곁에는 제 아이가 다치지 않기를 뒤처지지 않기를 바라는 평범한 부모가 있습니다. 그 사랑이 불안과 만나 이따금 길을 잃을 뿐, 누구도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드라마 속 주먹이 아니라 선생님과 부모와 아이가 다시 서로를 믿게 해 주는 든든한 울타리입니다. 

그리고 그 울타리는 선생님 한 분의 인내나 부모 한 사람의 양식에만 맡겨 둘 수 없습니다. 이제는 국가가 중심을 잡고 나서야 합니다. 무고한 신고로부터 선생님을 지켜 드리고 행정의 짐을 덜어 다시 수업으로 돌려보내 드리며 사교육에 빼앗긴 공교육의 자리를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는 일입니다. 법은 갈등을 멈추게 할 수는 있어도 신뢰까지 명령할 수는 없기에 그 신뢰의 마중물만큼은 국가가 먼저 부어야 합니다.

저는 사교육 현장에서 천재학원과 파랑새학원을 운영하며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제 마음에서 변치 않는 한 문장이 있습니다. “교육이 바로 서야, 사회가 바로 섭니다” 「참교육」의 통쾌함이 부디 드라마 안에만 남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교실에는 굳이 영웅이 등장할 필요조차 없는 평범하고 따뜻한 하루가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들녘에 노을이 물들 듯 한 아이의 더딘 걸음을 묵묵히 기다려 주는 그 평범한 하루를 말입니다. 지치고 흔들린 이 땅의 모든 교실에, 그리고 우리 옥천의 작은 교실들에, 저는 드라마 속 그 한마디를 그대로 건네고 싶습니다.

“괜찮습니다. 우리, 다시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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