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는 산신제, 마을 어귀에서는 수살맥이…청마리 동제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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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는 산신제, 마을 어귀에서는 수살맥이…청마리 동제의 두 얼굴
  • 이성열 기자
  • 승인 2026.09.03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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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북도 무형유산 지정예고 특집 ] 옥천 마을 탑제 ③

 


“정월 보름날 탑, 장승, 솟대 위하는 것을 원래 주살맥이라고 했어요”
동이면 청마리 마티 주민들이 기억하는 마을 제사의 모습이다. 정월이 되면 먼저 마을 뒷산에 올라 산신에게 정성을 들이고 대보름에는 마을 어귀로 내려와 탑과 짐대(솟대), 장승을 차례로 돌며 제사를 지냈다. 주민들에게 이 둘은 별개의 풍습이 아니라 한 해 마을의 평안을 비는 하나의 공동체 제사였다.

2022년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이 펴낸 ‘옥천 청마리의 산제와 수살맥이’가 밝힌 청마리 동제의 핵심도 바로 이 구조다.

청마리 마티에서는 음력 정월 초사흘에 산신제를 지내고 정월 대보름에는 수살맥이를 지낸다. 산신제는 마을 뒤편 소나무를 산신당으로 삼아 지내고 수살맥이는 마을 어귀에 있는 탑·짐대·장승을 차례대로 돌며 지낸다. 민속학에서는 산신당을 ‘상당’, 마을 입구의 신앙공간을 ‘하당’이라 하고 각각의 제사를 ‘상당제’와 ‘하당제’라고 설명한다. 두 의례가 서로 보완하면서 하나의 동제를 이루는 ‘동제의 이중구조’다.

이 같은 구조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만 둘로 나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산 위에서는 제한된 제관이 엄격한 금기를 지키며 산신을 모시고 마을 어귀에서는 주민들이 제사에 참여하고 제물을 나눴다. 하나는 엄숙함이, 다른 하나는 공동체의 참여가 두드러졌지만 결국 목적은 마을 전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데 있었다. 청마리 동제를 이해하려면 두 의례를 함께 봐야 하는 이유다.


산 위의 산신, 마을 전체를 관장하다

상당제에 해당하는 산신제는 조용하고 엄숙하다.
청마리 주민들은 산신을 마을 전체를 관장하는 신령으로 여겼다. 산신당은 마을 뒤 산속의 소나무다. 연구에서는 산신을 마을신앙 가운데 가장 높은 신령인 ‘상당신’으로 설명한다. 반면 탑·짐대·장승은 마을 입구에서 마을을 지키는 ‘하당신’이다.

산신제는 현재 음력 정월 초사흘에 지낸다. 과거에는 정초에 길일을 골라 지냈으나 오래전부터 초사흘로 고정됐다.

 

동이면 청마리 상당제인 '산신제'
동이면 청마리 상당제인 '산신제'

 

제사를 지낼 제주를 정하는 것부터 까다로웠다. 섣달이 되면 생기복덕을 따져 운이 맞고 ‘깨끗한’ 주민을 골랐다. 산신제 제주와 수살맥이 제주도 각각 따로 선출했다. 상중이거나 집안에 임산부가 있는 경우 등 주민들이 ‘부정’으로 여긴 조건에 해당하면 제주가 될 수 없었다.

제주로 정해지면 산제 일주일 전부터 집 대문 앞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놓았다. 사흘 전부터는 목욕재계를 하고 행동을 삼갔다. 가족들도 살생하거나 피를 보는 일을 피했다. 제주뿐 아니라 주민들도 산제를 앞두고 육고기를 먹지 않는 등 함께 금기를 지켰다.

제물 역시 산신제의 성격을 보여준다. 백설기와 삼색실과 호두, 통북어, 술 등을 마련했다. 육고기는 올리지 않았다. 떡도 팥을 넣지 않은 흰 백설기를 썼고 간도 하지 않았다. 술만큼은 제주 집에서 직접 빚어 올렸다.

해가 지면 제주 내외가 제물을 들고 산신당으로 향한다. 산제나무인 소나무에 줄을 두르고 백지를 묶은 뒤 나무 아래 짚을 깔고 제물을 차린다. 제주가 마을의 안과태평을 빌며 술을 올리고 절을 한 뒤 마을 전체를 위한 소지와 집집마다의 소지를 올린다.

그 시간 마을 주민들도 집 밖 출입을 삼가고 불을 밝힌 채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산에 올라간 것은 제주였지만 산제를 함께 지내는 주체는 마을 전체였던 셈이다. 산제를 마치고 내려오면 주민들은 제주 집에 모여 음식을 나누고 마을 일을 의논했다.


산제가 끝나면 대보름 수살맥이

산신제가 산속에서 엄숙하게 치러졌다면 정월 대보름의 수살맥이는 마을 어귀에서 주민들이 함께하는 제사였다.

‘수살맥이’는 마을 밖에서 들어오는 좋지 않은 ‘살’을 막는다는 의미다. 청마리 주민들은 사투리로 ‘주살맥이’라고도 불렀다. 중요한 것은 수살맥이가 탑 하나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을 입구의 탑·짐대·장승을 모두 아우르는 신앙 대상과 그 제사를 주민들은 수살맥이라고 불렀다.

산신당이 마을을 위에서 보살피는 공간이라면 하당은 마을의 안과 밖을 가르는 일종의 ‘대문’이었다. 연구에서는 이곳을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을의 경계로 설명한다. 청마리 주민들은 이곳을 ‘장승백이’, ‘조산들’ 등으로도 불렀다.

수살맥이는 과거 해가 뜨기 전 새벽부터 시작됐다. 풍물패가 마을을 돌며 쇳가락을 울려 잡귀를 몰아낸 뒤 탑으로 향했다. 이후 외부에서 제사를 보러 오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제사 시간이 오전으로 바뀌었다.

제물에는 산신제와 차이가 있었다. 산신제에는 올리지 않던 돼지머리를 올리고 떡도 주민들이 나눠 먹을 수 있도록 넉넉히 마련했다. 그리고 하나의 제물을 들고 탑→짐대→장승 순으로 옮겨가며 정성을 들였다.


탑에서 시작해 짐대, 장승으로

첫 번째는 탑이다. 탑 앞에 돼지머리와 떡, 술, 삼색실과, 북어 등을 차린 뒤 징을 세 번 친다. 제주가 술을 올리고 절한 뒤 마을 전체를 위한 대동소지와 집집마다의 소지를 올렸다. 제사가 끝나면 탑의 머릿돌에 백지를 둘러 ‘폐백’을 드리고 제물을 조금씩 떼어 탑 아래에 놓았다. 주민들은 탑 주변에서 음복했다.

이어 탑에 올렸던 제물을 그대로 짐대(솟대)로 가져갔다. 별도의 제물을 새로 차리지 않았다. 탑제와 비슷하게 정성을 들이고 짐대의 장대에도 백지를 묶었다.

 

동이면 청마리 수살맥이 중 '짐대제'
동이면 청마리 수살맥이 중 '짐대제'


마지막은 장승이다. 짐대에 놓았던 제물을 다시 천하대장군 앞으로 옮겨 제사를 지냈고 이어 맞은편 지하대장군에도 술을 올리고 절했다. 이 과정을 모두 마치면 사정이 있어 제사에 나오지 못한 집에도 제물을 나눠 보냈다.

예전에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풍물패가 마을 공동샘으로 가 샘굿을 하고 다시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마당밟이를 했다. 안마당에서 부엌과 장광까지 돌며 액을 막고 집안에 재수가 있기를 빌었다. 대보름 하루 동안 풍물 소리가 마을을 채웠다. 지금은 샘굿과 마당밟이는 고령 주민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이 과정에서 제사는 특정한 신앙 대상만을 위한 행위에 머물지 않았다. 탑 앞에서 시작한 제물이 짐대와 장승으로 이어지고 다시 공동샘과 집집마다의 마당으로 확장됐다. 마을의 입구에서 시작해 생활공간 전체를 돌며 액을 막고 복을 비는 구조였다. 수살맥이가 공동체 전체를 대상으로 한 의례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탑은 막고, 짐대는 하늘과 잇고, 장승은 지킨다

탑·짐대·장승은 같은 하당에 있지만 각각의 상징도 달랐다.
탑은 마을과 바깥의 경계에서 좋지 않은 액운과 잡귀가 들어오는 것을 막는 신앙조형물로 이해됐다. 청마리의 탑은 높이 약 4m, 밑둘레 약 15m로 옥천의 마을 탑 가운데 비교적 큰 편이다. 주민들은 문화재 지정 이전부터 이를 특별한 이름이 아닌 그냥 ‘탑’이라고 불렀다.

짐대는 높은 소나무 장대 끝에 나무오리를 올린 형태다. 청마리에서는 ‘솟대’보다 ‘짐대’라는 이름도 사용했다. 장대에는 황룡과 흑룡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표현했는데 주민들은 용이 제대로 하늘로 올라가야 때맞춰 비가 내려 농사가 잘된다고 여겼다. 우순풍조와 풍년의 바람이 짐대에 담긴 것이다.

장승은 마을의 수문장이다. 마을 길 양쪽에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이 마주 보고 섰다. 연구에서는 장승의 기본적인 역할을 잡귀와 재액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으로 설명한다.

 

동이면 청마리 수살맥이 중 '장승제' 
동이면 청마리 수살맥이 중 '장승제' 

 

특히 청마리에서는 윤년이 되면 장승과 짐대를 새로 만들었다. 주민들이 산에 올라 소나무를 고르고 산신에게 나무를 베겠다고 고한 뒤 장승목과 짐대목을 가져왔다. 마을의 손재주 좋은 사람들이 직접 장승을 깎고 짐대를 만들었다. 주민 유영철 옹도 조사에서 “마을을 지키는 장승목을 해오는 건데 아무거나 베어올 수 없지”라고 기억했다.

장승과 짐대를 만드는 과정 자체도 전승의 한 부분이었다. 어떤 나무를 고를지 산신에게 어떻게 고할지 누가 장승을 깎고 짐대의 오리를 만들지에 대한 지식이 주민들 사이에서 이어졌다. 완성된 장승과 짐대만 남기는 것으로는 이런 기술과 절차까지 보존할 수 없다. 청마리 동제의 ‘무형’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경험과 역할 속에도 존재했다.


제신탑 하나만 보면 청마리 동제를 놓친다

‘옥천 청마리의 산제와 수살맥이’가 특히 강조하는 부분도 여기에 있다.
1976년 청마리 탑 등이 ‘옥천 청마리 제신탑’이라는 명칭으로 당시 충청북도 민속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이후 외부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탑과 정월 대보름 탑제에 집중됐다. 과거 조사에서도 돌탑·장승·솟대를 대상으로 한 대보름 제사는 소개됐지만 산신제는 빠지는 경우가 있었다.

연구진은 이런 시각만으로는 청마리 동제 전체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봤다.
탑은 하당신 가운데 하나이며 주민들은 탑과 짐대·장승을 모두 묶어 ‘주살맥이’ 또는 ‘수살맥이’라고 불렀다. 더 나아가 마을 뒷산의 산신제와 마을 입구의 수살맥이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상당제와 하당제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산에서는 소수의 제관이 엄숙하게 산신을 모시고 마을 어귀에서는 주민들이 탑·짐대·장승을 돌며 정성을 들였다. 그리고 제사를 마친 뒤에는 음식을 나누고 풍물을 치며 마을 전체가 어울렸다. 돌탑 한 기가 아니라 제사를 준비하는 방법, 제주를 정하는 방식, 금기를 지키는 규칙, 탑과 짐대·장승을 차례로 모시는 절차, 그 안에서 마을의 안녕을 함께 빌어온 주민들의 기억까지가 하나의 문화였던 것이다.

이 점은 현재 논의되고 있는 ‘옥천 마을 탑제’를 무형유산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다. 눈에 보이는 탑은 그 문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흔적이다. 그 탑을 누가 어떻게 위했고 산신과 장승·짐대까지 어떤 관계 속에서 모셨으며 주민들이 무엇을 빌고 어떻게 함께 참여했는지를 함께 보아야 옥천 마을 탑제가 지닌 무형의 실체가 비로소 드러난다.

결국 청마리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오래된 돌탑을 보존하는 일’과 ‘마을 탑제를 전승하는 일’이 같지 않다는 점이다. 탑은 그대로 있어도 제주를 맡을 사람과 제물을 준비할 주민, 장승을 깎고 짐대를 세우는 기술, 산신제와 수살맥이의 순서를 기억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의례는 이어지기 어렵다. 무형유산으로서 바라봐야 할 대상은 탑이라는 물체를 넘어 그 주변에서 한 해의 안녕을 함께 빌어온 주민들의 행위와 지식, 공동체의 기억까지 포함한다.


 / 사진 출처 : 옥천 청마리의 산제와 수살맥이(2022) /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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