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여 년간 양복 기술로 패션 선도해온 외길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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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여 년간 양복 기술로 패션 선도해온 외길 인생
  • 천성남국장
  • 승인 2017.06.08 1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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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이원면 ‘신흥양복점’ 손춘택(82)옹
1960년대 신흥양복점 개점 패션바람 일으킨 장본인
서울·대전 등서 심부름하며 눈썰미로 배운 양복기술
손춘택옹.

세태에 밀려 양복맞춤에서 양복수선으로 점점 퇴색

2013년 이시종 충북지사로부터 외길직업인 표창패

30년 전, 성황을 이뤘던 전통양복점이 세태에 밀려 하나, 둘 문을 닫고, 20여 년 전 쯤 부터 생겨난 기성복 브랜드가 양복점 맞춤정장 매장으로 변모하며 양복마니아들을 싹쓸이했다. 20세 때 서울, 대전 등으로 건너가 당시 생업 기술로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을 만큼 경쟁이 셌던 양복 기술을 눈썰미로 배운 그는 60여년 넘게 이원면에서 양복을 책임지는 터줏대감으로 살아왔다. 세월의 변천사 속에서 이제는 양복맞춤업보다는 동네방네 입소문으로 찾아오는 옷수선으로 손님을 반갑게 맞고 있다는 그는 동네사람들의 인정(人情)을 나누는 경로당 역할도 해내고 있을 만큼 시간만 되면 지인들이 늘 찾아주고 있단다. 누가 보더라도 1980년대를 풍미하는 조그만 옛 가게에서 알콩달콩 노부부가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전천후 ‘신흥양복점’의 손춘택(82)옹을 만났다. 〈편집자주〉

반세기 넘는 역사어린 ‘신흥양복점’

옥천군 이원면 강청리 이원역전 앞에 고즈넉이 60여년의 세월을 지키며 손님을 맞고 있는 ‘신흥양복점’이 마치 살아있는 역사처럼 정겹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는 사람 붙잡지 않고 오는 사람 반기는 것을 철칙으로 삼는 이곳은 마치 ‘그 때를 아십니까’ 드라마 세트장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과거로 돌아가게 하는 타임머신이다.

세월을 이겨내고 서있는 낡고 비좁은 오래된 가게는 한국일보 지국 현판이 여전히 달려 있고, 새벽마다 손옹의 발이 돼주는 자전거와 눈비를 맞으며 세월을 견뎌온 신흥양복점 간판이 한눈에 확 들어온다.

반세기가 넘도록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신문을 배달해온 그는 신체 4급장애를 갖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장애를 이기고 꿋꿋이 살아온 (영원한 청년?)이기도 하다.

“큰 사고요? 있었지요. 5년 전, 새벽에 신문을 돌리다 자전거가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병원 신세를 좀 졌지요. 한 3주 정도 누워있으니 또 일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 해오더라구요."

양복지와 수선 양복.

이원초 27회 졸업 양복기술 배워

해방 후 5세 때 일본에서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건너온 그는 이원초등학교(27회)를 나와 열심히 성실한 가장으로, 양복기술자로 한평생을 일궈온 생활인이기도 하다.

“요즘은 자꾸 나이를 먹으니 상세한 기억은 잘 안나요. 재봉틀만 돌리면 그때의 지나갔던 추억들이 잘 생각날 법도 한데 이제는 소리를 들어도 저만큼 아득해지기만 하니 나이를 먹긴 먹나봅니다.”

언제나처럼 일상의 재봉틀을 돌리며 고객들의 양복바지며 상의며 가리지 않고 정성껏 수선을 하고 있는 손옹은 아직은 몸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날렵한 손길이 그때 그 시절 노련한 양복숙련공으로 돌아갈 정도로 여전히 손에 붙은 기술이 탁월하다.

자크와 수선 장비.

“맞춤은 거의 없어요. 지금은 양복 수선만을 주로 합니다, 세월이 감에 따라 고객들의 취향도 많이 변했어요. 맞춤보다는 기성복 브랜드가 잘 나와 이제는 양복을 맞추려는 사람들이 없어요. 그러니 수선만 할 수 밖에요. 눈은 그래도 아직 짱짱한 덕에 재봉틀 미싱 바늘귀에 실도 척척 꿰는 천리안이지요. 예전엔 양복을 맞추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주었던 전성기가 분명 있었지요.”

손춘택.고영순씨부부.

아내 고영순씨, 양복점 내조한 일등공신

이날 평생 남편의 옆자리를 지키며 아들딸 키우고 조석수발하며 양복점 일을 적극 지원해온 세 살 아래인 아내 고영순(79)씨가 언제나처럼 애정 섞인 잔소리를 하며 웃음을 띤 채 “이 양반은 어려서 서울 가서 잠깐 기술을 배우고 내려와 본격적인 기술은 대전에 가서 배워왔대요. 대전역전 앞 ‘덕신양복점’에서 2년을 배웠다나요. 남들보다 눈썰미가 좋았던 남편은 2년 만에 금방 양복기술을 배우게 됐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손옹은 “워낙 가난해 밥 먹고 사는 길은 오직 기술밖에 없다고 생각했지요. 기술을 잘 안 가르쳐 줘 심부름 하면서 눈치코치로 열심히 배웠지요. 그래도 그때 양복기술을 배워 놓아 일찍 작고(54세 때)한 아버지 대신, 장남으로서 칠남매를 고등학교까지 가르칠 수 있었지요. 양복기술로 없는 집에서 동생들 시집, 장가보내는 등 나름 역할을 할 수 있었으나 장애를 가진 다리(장애4급) 땜에 고생을 좀 하긴 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아내 고씨는 “내가 23세 때 이 양반한테 시집 올 때만 해도 집은커녕 아무것도 없어 생고생도 많았다”며 “그래도 이 사람이 이만큼 노력한 대가로 지금은 이층집을 짓고 살고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실을 찾는 손춘택옹.

1960년대 신랑예복 값이 쌀 한가마니 값

손옹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62년 전인 1960년대는 신랑 예복한 벌 값이 쌀 한가마니 값 이었다”며 “내 나이가 82살이 되니 까마득한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웃음 지었다.

일본 야마구치가 고향인 손옹은 “해방 전, 부친을 따라 5세 때 나왔는데 현재 4급장애인 다리는 일본 거주할 때 마루에서 떨어졌던 기억이 난다”며 “이 다리로 그래도 60여 년을 하루같이 한국일보 창간 때부터 시작한 신문돌리기를 자전거로 해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강한 의지를 보였다.

“지금 이 집에서만 70년을 삽니다. 이집은 나의 살아온 역사뿐만이 아니고 이원면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산물이지요.”

손옹은 또, “양복점 수선료는 옷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그래도 규정 가격은 있어요. 3000~ 5000원선이지요. 때에 따라선 1만원선 내외를 넘을 때도 있다”라며 “비록 조그만 가게이지만 정년 없는 내 직장으로 가게 문을 열고 있어 자부심도 느껴지며 이웃들의 만만한 놀이터로 언제든지 놀러 와도 좋은 장소로 활용되고 있어 행복하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고 말했다.

동네 지인들이 양복점을 찾아와 담소하고 있다.

“신문이요? 한국일보지국을 운영한지도 어언 60여년을 넘기고 있네요. 창간 때부터 이원지국을 맡아 2시간 동안 150부 가량 돌렸는데 지금은 봐주는 친구들이 저 세상으로 하나 둘 떠나가는 바람에 지금은 50부만 돌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장 보람 있고 좋았을 때가 언제냐고 묻는 질문에 손옹은 “매일 매일 잊어버려요. 그러나 생각해보면 1970년대쯤이 저의 전성기로 인생 팔팔할 때 돈을 많이 벌어 이층집 지을 때가 가장 보람 있고 좋았다”고 말했다.

“인생을 돌아보면 누구한테도 덕 보는 일이 없었다. 홀로 가세를 일구다보니 늘 주변에서 겪어야 하는 희로애락이 많았다. 돈 잘 벌 때는 그래도 정말 좋았지요.”
손옹은 “매일 새벽이면 운동 삼아 신문 돌리는 일인데 수십 년 동안 아직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어 한국일보 장기근속자로 표창장과 부상을 받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양복의 역사는 1876년 한·일수호조약과 함께 들어오기 시작한 외국인과 양복의 도래로 자연히 양복을 지어 입을 수 있는 상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최초로 생긴 양복점은 1896년 광화문 우체국 앞의 하마다 양복점으로, 일본인이 운영했다.

이시종 충북도지사에게 외길직업인 표창패를 받는 손춘택옹.

아내가 붙인 전에 막걸리 한잔 건강비결

이렇듯 역사를 담아내고 세월의 변천사에 따라 진화하는 가게들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살아왔던 풍속과 역사적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언제나 가게를 지키며 술도 좋아하고 풍류를 즐기는 손옹은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친구들이 찾아 올 때가 요즘은 가장 즐겁다고 한다.

“한참 일을 하다가 친구들이 가게로 찾아오면 그야말로 마을경로당이 되는 거지요. 아내가 전이라도 부쳐 막걸리라도 한잔 할 때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세상 재미가 솔솔 풍겨 나옵니다. 그것이 건강의 비결 아닌가요.”

행복은 늘 가까이에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 손옹은 “매년 명절 때는 물론이고 여러 동생들이 찾아와 용돈도 쥐어주고 선물도 사서 건네줄 때 이런 행복이 없다”며 “남은여생을 고생한 보람을 느끼며 아내와 살 수 있게 된 것에 감사를 느낀다”고 말했다.

양복전문 기술자로 한평생 투철한 직업정신과 장남으로 7남매를 잘 성장시킨 손옹은 상복도 터져 2013년 7월 1일 충청북도 이시종 지사로부터 외길직업인으로 선정, 표창패를 받기도 했다.

“인생이 무엇 있습니까. 열심히 배우고 익혀 3남매 자녀들 잘 키우고 동생들 뒷바라지 하고 지금은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이제 여든을 넘긴 손옹은 60여년의 외길인생을 걸어오며 남은여생을 아내와 자식들과 동생들, 그리고 이웃들과 잘 지내며 콧노래 부르며 사는 인생예찬을 이렇게 펼쳐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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