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사는 ‘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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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사는 ‘을’들
  • 김현희
  • 승인 2017.08.31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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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이다. 오늘 뭔가 했더라고 그것이 내일 사라지는 일은 부지기수이다. 예를 들어 오늘 누군가를 만나서 뿌듯한 경험을 했어도 내일이면 그 경험이 별 볼 일 없어지는 일은 허다하다. 그래서 사는 게 즐거우려면 순간을 즐겁게 보내야 한다. 그 순간이 슬픔이고 좌절일지라도, 슬픔이나 좌절이 영원히 계속 되지 않기에 슬프면 슬퍼하고 좌절이 오면 좌절하면 된다. 새옹지마라고 오늘 두려운 일이 내일은 아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현대 사회가 노력해서 성공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무한 경쟁 구조이기에 내 앞뒤로 경쟁자들이 수두룩하고 기회의 결과가 제일 많이 노력한 자에게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오늘이 수고롭든 만족하든 그 자체를 즐기는 연습은 ‘뭘 해도 안 되는 사람’이 세상을 버티는 방법이다. 내가 받은 고통이나 우울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면 그 순간부터 허세나 겉치레에 시달리기 때문에 무의미한 ‘나’를 견디는 연습도 놀이처럼 하면 하루가 즐거울 수 있다.

삶의 별 볼 일 없음을 긍정하는 자는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경제 사회적 위치에 따라 상대적 지위로 규정 당해 ‘을’의 역할을 하는 게 일상이다. 물론 ‘을’의 부당한 처우에 저항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저항이 있다고 해서 서열 체제가 바뀌는 세상이 아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 주어진 자기 역할을 일종의 놀이라고 생각하고 즐겁게 하면 역설적이게도 자기의 자존을 살리는 방법이라고 본다.

자존은 이제 변치 않는 고유성이 아니다. 자존은 어떤 공간에서 어떤 역할이냐에 따라 차이를 반복하는 물 같은 유동체이다. ‘자아’는 상황 속에서 규정되었다가 상황 끝나면 다른 모습을 띠는 형체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어떤 순간에서 생기는 두려움과 분노와 불안

같은 부정적 감성을 피할 필요가 없다. 어떤 성공 신화에 사로잡혀서 자기 삶을 열심의 제물처럼 만들어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행동은 성과가 없을 경우에 가책과 죄의식과 자기 비하로 밤잠을 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를 사회적 역할에서 무엇도 될 수 있고 누구도 될 수 있는 유기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그래야 먹고 살기 힘든 현실을 유머러스하게 견뎌낼 수 있다. ‘을’들에게 산다는 건 주어진 힘듦을 익살과 해학으로 버티는 일이다. 그러한 생존은 자기 삶을 견디고 책임지기 때문에 순결하다고 본다. 자기를 즐기는 사람은 비극적인 땅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천국이나 극락이 허구임을 알고 있다. 또한 먹고 살면서 경험하는 외로움을 긍정하며, 타인도 그러려니 하면서 배려하는 사람은 즐겁게 살 수 있다.

 

이력 : 충남대 국문과 석사 졸업.

        2016년 ‘서정문학’ 시 부문 신인상 수상.

       사주명리학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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