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고통이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아름다움은 언제나 고통과 함께 있다는 점이다. 환상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뿐 아니라 환상이 깨지는 순간의 고통 또한 아름다울 수 있으니, 고통과 아름다움은 환상의 배를 찢고 나온 일란성 쌍둥이라 할 만하다. 환상에게서 태어난 그것들은 다시 제 배로 환상을 낳기도 해서, 고통이 낳은 환상과 아름다움이 낳은 환상이 결합하여 또 다른 고통과 아름다움을 낳는 것이다. 그러니 지상의 짧은 삶에서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자는 결코 고통과 헤어질 수 없다”
이성복 시인의 언어다. 시인이 쓰는 에세이는 시를 닮았다. 하여 내용만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오름 오르다’는 제주도 사진작가 고남수의 사진을 보고 이성복 시인이 쓴 사진에세이다. 시인은 언어라는 이질적 렌즈로 사진 속 풍경을 재구성해 놓는다. 언어로 찍은 사진이라고 해도 좋겠다. ‘사물 혹은 비밀이라는 빌미’, ‘끊어진 길들의 하얀 만남’, ‘키 작은 꽃들의 간헐적 불면’, ‘검은 삼나무 장벽과 사각 무덤들’, ‘꽃 핀 복숭아나무 가지의 능선’ 등 몇 개의 제목을 옮겨 놓는 것은 이 시인의 언어가 주는 맛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화가나 음악가 혹은 작가들 곧 오직 한 길만을 오래도록 걸어온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온 매체를 닮는다.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세상을 표현하는데 능통한 자들이다. 대한민국에서 내노라하는 시인의 언어를 관람하는 것은, 여름을 나는 좋은 방법일 수 있겠다. 그것은 아마도 갤러리에 가서 그림을 감상하는 일과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까 “지난 여름 고비의 한 촌락에서 만난 어린 낙타의 눈도 그러했다.
길을 잘못 들어 늦게 도착한 그곳에서, 평탄하게 이어진 모래언덕을 배경으로 한 무리 낙타들이 무릎을 꿇고 거북등처럼 포개 앉아 있었다” 본 문 속의 내용이다. 사진 한 장을 보고 쓴 글의 첫머리다. 사진은 흑백의 제주 오름이었다. 시인은 그곳에서 사막에 어린 낙타의 눈을 떠오르게 한다. 전혀 별개의 것은 곧 상상이 불러낸 자유로운 환시쯤이라고 하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