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 있는 여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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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있는 여자(1)
  • 박미련 작가
  • 승인 2024.04.18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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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이유 없이 불안했다. 불청객을 떨치려 자신과 싸우고 있는데 시고모로부터 전화가 왔다. 모깃소리로 한동안 울먹이더니 “은아 에미야, 언니가 췌장암 말기랜다.” 멀쩡하던 분이 겨우 4개월밖에 살 수 없다는 전갈! 사실일리가 없다.

익숙한 것들과 이별하라는 하늘의 명령은 지엄했다. 항암치료도 무의미하다는 의사의 말은 자식들을 죄인으로 만들었다. 살피지 못한 죄책감이 하늘에 대한 원망도 잦아들게 했다. 서둘러 큰 병원으로 갔지만 같은 진단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어머니와 눈을 마주할 수 없다. 곧 떠난다는 어머니를 위로할 마땅한 말을 찾느라 머리를 쥐어짰다. 어떤 문장을 떠올려보아도 언어는 속빈 강정처럼 허술했다. 불쑥 튀어 나온말이 “어머니, 전복죽이 나을까요? 잣죽이 나을까요?”라니. 어이가 없다. 그때부터 우리의 연기는 시작되었다. 진실은 때로는 그 자체가 무기가 되었다.

입에 올리는 순간 칼날처럼 날카로워 당사자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었다. “어머니, 이거 드셔야 회복이빨라요. 많이 먹고 얼른 일어나셔야지요.” 아보카도를 요거트에 잘게 다져 떠먹이면서 어머니께 거짓말을 했다. 잠시나마 암덩이가 사라질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맞다. 먹어야낫지.” 모래알 같은 그것을 넙죽 받아먹으며 어머니도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이어갔다. 어머니께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않은 사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우리는 이렇게라도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그 후로 주말마다 어머니를 뵈러 간다. 처음에는 항암치료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의사도 권하지 않았다. 본인의 처지를 알고 나니 어머니도 머뭇거렸다. 그래도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시간은 가속도가 붙어 허무하게 사라져갈 텐데. 가장 약한 것으로라도 시작하여 조금이라도 더 어머니를 붙잡아두고 싶었다. 내게 어머니는 그냥 엄마다. 시어머니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게 서로 많은 정을 주고받았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 어머니를 소개할 때마다 즐겨 쓰는 수식어이다. 천성이착한 어머니는 맏며느리로 시집와 평생을 시부모 모시고 남편의 일곱 남매와 함께 살았다. 큰아들보다 한 살 많은 시누이를 같이 키워야 했다. 빠듯한 살림인지라 더더욱 내 자식만품으며 살 수 없었다. 다섯아들을 합하여 대가족의 입을 책임져야 했다. 알아서 스스로 뒷전으로 나앉는 큰아들이 안쓰러워 어느 날 몰래 삶은 계란을 먹이려다 들키고 말았다.

덕분에 서슬 퍼런 시어머니께 혼쭐이 난 얘기는 두고두고 하셨다. 그렇게 어머니는 가난한 현대사 한복판을 위태롭게 건너왔다.

시집온 지 오십 해를 훌쩍 넘긴 어느 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아들 딸보다 더 서럽게 울었다. 여러 달이 지나고 서서히 기운을 차렸다. 울타리가 되어주던 분을 먼저 보낸 허전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겠으나 남편과 단둘이살 앞날에 대한 기대 또한 컸으리라. 어느 날부터 어머니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군식구들모두 떠나보내고 칠십이 넘어서야 겨우 맛보는 남편과의 오붓한 생활이다. 내심 얼마나 설레었을까. 그러고 보면 어머니의얼굴은 늘 엷은 홍조를 띠곤 했던 것 같다. 홀가분하게 나들이도 다니면서 시간을 알차게 보냈다. 한글학교에 등록도 했다. 언감생심 이런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다며 의욕에 찼다. 3년을 우등생으로 다니고는 자신의 마음을 글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을 담아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내 우리를 감동시켰다.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쓴 어머니의 편지는 사랑이었다. 

 그 후로도 어머니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이야기를 글로 옮겨 쓰기 시작하였다. “무식한 나 같은 사람도 감정이 솟구치더라. 여섯 살 때 돌아가신 울 엄마 얘기를쓰려니까 눈물이 앞을 가려 쓸 수가 있어야지.” 세 살 된 동생을 죽어가면서도 끌어안고 젖을 물리던 그녀의 엄마 이야기를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완성하였단다. 여러 편에 걸친 그녀의 인생 이야기는 당신이 떠난 후풀어보라며 꽁꽁 숨겨두고 내놓지를 아니했다.“어머니를 보내고 이제 우리 부부가 멋지게 살아보려 하는데 허리가 너무 구부러져서 남편 보기가 미안하다.” 그녀가 쓴 글 중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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