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들의 수다를 음악 삼아 들으며 7인승 내 차가 영동고속도로를 달린다. 겨울에 환상의 설경을 그려 놓던 백두대간 산마다 다채로운 녹색 잔치다. 아름다운 풍광이 스며드는 승용차 안의 작은 공간이 덩달아 풍요롭다.
우리 다섯 자매가 모처럼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친척 혼사에 참석할 겸 어린 날의 추억을 더듬어 가는 길이기도 하다.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운 여행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 마음이 부푼다. 강릉,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완만한 곡선으로 다가오는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며 격세지감을 느낀다. 40여 년 전에는 고향 가는 이 길이 얼마나 멀었던가.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수도권과 동해안을 연결하는 국도와 철도, 항공이 있었지만, 이용이 불편했다.
철도는 긴 단선 노선으로 서울에서 강릉까지 무려 열한 시간 반이나 걸렸고, 국도 또한 도로 상태가 나빠 서울-강릉 간 버스가 주행하는 시간이 9시간가량 걸렸다. 불편한 교통 때문에 나는 여름과 겨울방학이 되어야만 고향 집에 갈 수 있었다.
영동고속도로가 1975년에 전 구간이 왕복 2차로로 개통하였고, 2001년에는 4차로로 확장 개통되어 지금은 서울에서 강릉을 두 시간 반이면 갈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한가.
간간이 자동차 룸미러 속의 동생들을 훔쳐본다. 몸을 붙이고 앉아있는 모습이 정겹다. 중년을 훌쩍 넘은 여인들의 입담으로 차 안은 화기애애하다.
“엄마, 고마워요. 우리를 이렇게 많이 낳아주셔서”라며 셋째가 어머니 어깨를 쓰다듬는다. 어머니가 의아하다는 표정이시다. 8남매, 그중에서도 딸을 일곱 명이나 낳으셨으니 젊어서는 죄인이듯 살아오시지 않았던가.
셋째는 싹싹하고 명랑한 성격이어서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맏딸인 나보다도 언니 역할을 잘한다. 해서 동생들에게 인기다. 넷째가 말을 이어받는다. 우리가 엄마 속을 태우지 않고 이렇게 무난하게 사는 것이 엄마의 복이라고 한다. 매사에 신중하고 사려 깊으며 효성도 지극한 동생이다.
다섯째도 거든다. “나이가 드니까 형제가 많은 게 얼마나 든든한지…”라고 다섯째는 인정이 많아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닮았다. 형제 중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발 벗고 나서서 도와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교사가 된 것이 천직인 듯싶다.
뒤 칸에 홀로 앉은 여섯째는 뒤따라오는 풍경에 취하고 있는지 말이 없다.
과묵하고 매사에 순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속 깊은 동생이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어려운 일이 닥쳐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대견하다.
우리는 사촌 언니네 결혼식이 끝난 후 고향 집이 있는 운산으로 향했다. 강릉 비행장이 있는 마을과 우리 동네 사이를 가르는 철길을 바라보니 동생들이 내 마중을 나왔던 모습이 떠오른다. 기찻길 옆에 옹기종기 모여 서서 손을 흔들던 동생들은 고향 집을 생각할 때마다 어김없이 함께 있었다.
경기도에서 근무하던 나는 일 년에 두세 번 방학 때에만 동생들을 만났다. 그 만남은 기찻길 옆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집에 가는 날이면 동생들은 집으로부터 1킬로가 넘는 거리에 있는 수로 둑에 미리 나와서 기차를 기다리곤 했다.
추운 겨울날에도 허허벌판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서울에서 출발한 기차가 하시동 터널을 빠져나오면서 내는 아득하게 들리는 기적소리가 그리도 반가웠단다. 동생들은 기차가 멀리서 모습을 드러내면 지레 손을 내저었다고 한다.
나도 기찻길 따라 펼쳐진 들판에 점점이 작은 물체가 나타나면 손수건을 차창 밖으로 힘껏 흔들었다. 올망졸망 모여 서서 내 손수건을 발견한 동생들이 두 손을 흔들며 팔짝팔짝 뛰었다. 내가 그 모습을 반기는 순간 동생들은 기차 꼬리로 빨려가듯 사라졌다.
동생들이 “큰언니야!”라고 목청껏 외쳤을 테지만, 그 소리가 기차 소리에 묻혀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 소리를 환청으로 들을 수 있었다. 동생들은 기차 고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고 한다.
강릉역에 도착하여 운산으로 거슬러 가서 집에 도착하면 우르르 달려들며 반겨주던 동생들! 실은 언니보다는 방학 때마다 내가 사다주는 ‘보름달’ 빵을 더 기다렸다고 셋째가 너스레를 떤다.